카파도키아의 멋진 기억을 추억으로 하고 심야버스를 타고 밤새 11시간을 달려 데니즐리에 도착했다.
데니즐리에서 돌무쉬를 타고 파묵칼레에 예약한 Lycus River 호텔에 도착...
오전 7시 이른 아침에 도착한 태우와 나는 호텔 로비에서 체크인이 되는 11시까지 졸며 자며 놀며 기다리다, 체크인하고 짐을 풀고, 다시 돌무쉬를 타고 파묵칼레 석회온천을 둘러보러 나왔다.

돌무쉬를 타고 Lycus River 호텔로 가는길...목가적이고 여유롭다.

요기가 파묵칼레 온천...석회온천..ㅎ 드디어 20년 숙원을 달성하다. 그런데 이곳 사람들은 물에 석회 함유량이 많아 이가 성한 사람이 없다고 한다.




한국사람이 얼마나 많이 오면...ㅎ 여기서도 신라면이 인기라는데...
우리 태우 신라면 사달라고 어찌나 노래 부르던지...

호텔 수영장... 유럽에서 온 아이들 같은데... 어른키보다 깊은 풀에서 신나게 논다. 팔에 붙인 부력물을 믿고...
최근에 한국에도 저거 나와서 사자고 했더니... 않좋다는 평가가 많다고~

호텔 안 온천인데...황토물인지 녹물처럼 보이지만 몸에 좋다고 하니... 근데 태우는 왜 저 비키니 아줌마를 물끄러미 처다보구 있을까? 음흉한 자슥...ㅋ

호텔 내부...우리가 묵었던 숙소 가운데 가장 럭셔리...근데 머 잠만 자는건데...그대루 난 카파도키아 동굴호텔(Aydinly Cave House Hotel)이 더 좋다~~


호텔 안의 암벽등반...태우가 한 50미터 올라간건가?????ㅎ

호텔 앞 돌무쉬 타는 정류장...

석회온천이 흘러내린 물에 발 담그고...

태우랑 터키 어린이랑...



저녁식사가 야외부페로 차려져 먹으러 가는 중


부페부페...맛있는 부페...

호텔 체크아웃하고...왜 돈을 세고 있을까????

현지 여행사... 다음 목적지 에페소를 가기 위해 쿠사다시로 가는 주간버스를 예약하고 짐을 맡기고 본격적으로 파묵칼레 석회온천 체험하러 고고~

요기가 바로 히에라폴리스 파묵칼레 석회온천 입구...목사님이 물이 많지 않을거라 해서 수영복도 안챙겼는데...

이렇게 물이 좋다. 이 정도가 물이 없는거면...아쉽다...물이 이정도였으면 전날 호텔에서 빈둥빈둥거리지 않고 물 속에 들어가 해질녘까지 놀아도 되었는디...ㅠ

여기서 수영복 안입은 사람은 한국사람... 외쿡사람 왠만하면 비키니~~


그림 조으다~

하..다시 가고싶다





이게 석회온천수 발원물줄기....

석회온천을 지나 더 위로 올라왔더니...

고대 원형극장이 짜잔~

2000여년 전 노예 글라디에이터들이 저 안에 갇혀 있었겠지.. 다음 경기를 준비하며




욜심히 게임 중이신 태우님.

여긴 왜 고추를 저리 많이 메달았을까??? 득남??? 아님 말려서 고춧가루 만들기???

마을을 걷다 우연히 마주친 무궁화...무궁화를 영어로 하면 Rose of Sharon...샤론의 장미라지??? 반갑네

Posted by 다울의 꿈

언젠가 다시오고싶은 곳...카파도키아...
습기찬 이스탄불을 벗어나 도착한 카파도키아... 보이는 것 자체가 힐링이요...공기부터가 달랐다.
나름 시골의 구석인데도 사람들이 찾는 이유가 있다.

이스탄불에서 터키 국내선을 타고 1시간 반을 날아와 도착한 카이세리 공항...
픽업이 와야만 카파도키아에 갈 수 있는데... 한국에서 예약한 픽업버스가 나타나지 않는다.
다들 떠나고 나와 태우, 그리고 한국여학생 몇 명만 불안한 기색을 보이며 발을 동동..
공항이라고 말 통하는 사람 하나 없고... 친절해 보이는 경비원에게 손짓발짓하며...
이스탄불에서 만난 하나로 여행사의 한국말 정말 잘하는 터키 아저씨 명함을 건냈다.
로밍을 안해서 연락 방법이 없던터라 친절한 카이세리 공항 경비아저씨 핸드폰을 전화를 해 전후사정 얘기하고 연락을 취해주었고... 깜박 낮잠자다 우릴 미아로 만들어버린 픽업 아저씨가 30여 분 뒤 나타나 다행스럽게 카파도키아 괴레매에 있는 예약한 동굴호텔에 도착했다. 너무 감사해서 경비원 아저씨에게 한국에서 가져 온 볼펜을 고마워서 주는 선물이라고 건네는데 한사코 마다하며 건너편의 CCTV를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그래서 고마움을 허깅으로 대신하고 픽업버스에 올랐다.

픽업버스에서 내리는데 카파도키아의 날씨와 주변경치는 정말 예술이었다.
스타워즈 촬영지라는 말이 실감이 났다. 외계에 온 느낌...ㅎ

화산재가 쌓여 풍화된 저 화산바위 위에 동굴을 뚫고 사람들이 살았고... 지금도 산다고 한다.

숙소에 짐을 내려놓고 태우와 주변을 구경하는데... 마차를 끌고 가던 친절한 아저씨... 내가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하니까... 태우를 옆에 앉히고 친절히 포즈를 취해준다. 가던 길도 멈추고.. 터키 아저씨들 정말 한국사람 좋아한다.

타이머로 셀카...그런대로 잘 나왔네... 배경이 좋으니까. 저 뒤가 스타워즈 촬영지란다.

여기가 우리가 머물던 괴레메 타운 번화가... 우리나라로 치면 아주 시골이다. 저기가 나름 수퍼마켓...

할아버지들이 태우에게 어디서 왔냐고 묻는다. 외국인과 대화하는게 쑥스러운 태우...수줍게 코.리.아... 할아버지들은 특히나 한국이라니까 더 좋아한다...

여기와서 콜라 참 여한없이 먹었다. 태우가 먹는 케밥은 치킨케밥... 젤루 싼거...비싼 케밥은 우리랑 안맞는다.

이건 우리가 있던 동굴숙소 안의 항아리... 냉장고도 없고 해서 혹시나하며 물을 넣어놨다. 시원해질래나????
시원해지진 않는다...ㅋ

카파도키아 투어 중... 무슨 투어더라...레드인가??? 기억두 안나네...

이게 동굴이다. 목적에 맞게 공간을 만들어 생활했단다. 

이 자식이 아빠에게 발길질이다. 

초대교회 동굴교회 입구

성경의 이야기들을 천연물감을 이용해 벽화를 

카파도키아 기암괴석들...여긴 뭐라더라...imagination park...비슷했는데...온갖 형상들을 하고 있어서

괴레메 파노라마...멋지죠~

2년 전인데 우리 태우 귀엽네...지금은 중2 징그러운뎅.ㅎ

여행 중 만나 서울대생...네덜란드에서 교환학생하고 유럽돌아 터키 여행 중... 짧은 기간 정이 들었지요...

참 듬직하지요? 지금은 다 임관해서 나의 안전을 지켜주고 있겠죠? 당시 경찰간부후보생들....

태우 넌 쵝오야~~

태우가 가장 잘 따르던...그리고 태우에게 너무 잘해주던 경찰간부후보생 형님...지금은 어디에??? 

투어 같이 하고 있는 일행들... 참 금방 친해져요.. 이틀 같이 다니니까..

잘못 보면 스카이다이빙하는 듯...

이건 말??????????????????????


얘는 Camel~




한국말로 영업하네요.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를 쫀득쫀득 아이스크림...돈두르마 아이스크림...

카파도키아 답게 동굴식당...냉방시설 없이도 시원하고 쾌적...다들 잘 지내죠???

카파도키아 지역 특산물..도자기..이뿌다만 나는 보는 눈이 없어서 패쓰~

괴레메 야외 박물관... 주변 경관 자체가 국보급...

괴레메 파노라마... 우주인이 나올듯한 분위기죠~

괴레메 타운... 정겹다..또 가고싶다는...

우린 심심하면 저렇게 점프샷을 찍었죠~

동행 투어를 마치며...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화이팅

카파도키아에서 유명한 마더스 레스토랑... 친절한 서울대형과 함께...

이번엔 아빠랑 함께... 우린 여기서 밥을 먹고 심야버스를 타고 다음 목적지 파묵칼레로 출~발~

Posted by 다울의 꿈

밀린 숙제하기...벌써 2년이나 지나버린 태우와의 터키 여행기

시간이 꽤 지났지만... 이스탄불에 대한 내 느낌은 유럽이 여기구나.. 중세풍의 건물들과 도로...그러면서 깨끗하게 잘 정리된 이스탄불은 분명 매력이 있었다. 건조함을 기대했다가 우리 한 여름의 습함을 가지고 있어 약간 당황스럽긴 했지만, 많이 사람이 왔다갔다해도 그리 분주해 보이지 않는 여유로움이 좋았다.


호텔에 짐을 풀고 아침먹으로...어찌나 당황스럽던지..그들도 영어가 짧고 나도 짧고...그림 보고 시켰다가 배불러 다 못먹고 호텔로 싸왔다가 버림..ㅠ

배도 채웠겠다...가이드북 보며 셀프학습 중인 아들..

아야 소피아의 내부는 아름다웠다. 역사가 느껴진다. 기독교가 지배하던 때에 지어져서 이슬람에게 넘겨진 역사.

첫 날이라 아직 태우는 쌩쌩하다.

난 이런 빛이 좋다. 태우 예쁘게 잘 나왔네...아야 소피아 계단 오르던 중 휴식


저거 엄지손가락 넣고 안빠지고 돌리면 소원 이루어진다는데..무엇을 빌었을까?

저 뒤는 술탄아흐멧 자미..일명 블루모스크... 이슬람의 라마단기간이라 관람에 제한이 있어 많이 보지 못했다. 더웠고


술탄아흐맷 구석에 앉아서 어디갈지 고민중...이스탄불  지도 보면서...난 태우의 선택을 존중했다.ㅎ

이스탄불에 있는 오벨리스크...역사는...찾아보시길

술탄아흐맷 거리를 걸어가는데 저들이 아들을 부른다. 사진 같이 찍자고...한량들 아닐까??? 대낮에 도심광장에서 노닥거리는... 하지만 친절하다는 그들..손색이 없다 그 명성.

여긴 이스탄불대학의 벤치...많이 걸었더니 일어나질 않는다.

터키에서의 첫 저녁만찬...비싼...그러나 양고기는 한 입 먹고 다 버렸다는...

둘째날 돌마바흐체 궁전을 들어가려는데 내 신발에 비닐 덧신을 씌우란다. 우린 경복궁 들어갈 때 그러나...신발을 벗나..아예 내부는 못들어가나? 정답은...

돌마바흐체궁전..태우 지치기 시작했나???

돌마바흐체 궁전을 나와 무작정 걸어 도착한 탁심광장...우리 명동같다. 우린 만세를 불렀다. 감으로 잘 찾아왔으니.

탁심광장의 상징탑...그들은 우리의 우방이요 형제의 나라다.


이스탄불의 대중교통수단 '트램' 도로중앙을 왔다갔다하는데...일반 차량들과 섞여 달리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깨끗하고 안전하고 편리했다.


트램을 타기 위해 토큰인 제톤 구매중...

우린 저 트램을 타고 어디로 갈까?

터키에서의 첫 공중부양...

여긴 그 유명한 마도 아이스크림... 쫄깃쫄깃 아이스크림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쫄깃쫄깃 아이스크림...
카파도키아에서 손님을 끌던 돈두르마 아이스크림 팔던 그 목소리가 생생하다.

Posted by 다울의 꿈

4년전 꾼꿈이 현실이 되었고, 지금은 과거가 되었다.
내 삶의 터닝포인트 후 처음 세운 목표였는데, 과거가 되었고, 추억이 되어간다. 초등학교 들어가 첫시험 백점맞은 아이처럼 들뜬 설레임이 아직도 내 마음과 머리를 채우고 있다. 작은 성공, 계획을 세우고 입으로 선언하고, 현실로 만든 여정들이 앞으로 더 큰 꿈을 꾸게할 거 같아 더 설레인다.

2012년 7월 26일 목요일 저녁 11시 55분 비행기. 27일 금요일 하루는 직원들에게 부탁하고, 목요일 업무 및 월마감하고 정신없이 집으로 와 서둘러 저녁먹고 집을 나섰지만, 광명사거리 공항버스 시간이 안맞아 4~50분을 기다렸다. 공항에 최소한 3시간 전, 그러니까 9시까지는 도착하라고 여행사 직원이 당부했지만, 난 10시가 다 되어서야 도착했다. 터키항공으로 가서 티케팅을 하는데, 여행사 직원이 좋은 자리를 선점해서 예약해 놓았단다. 걱정했는데, 창가쪽 편안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면세점들은 늦은시간이라 문들이 거의 닫혀있어 쇼핑할 기회조차 없었지만 이래저래 하다보니 탑승시간이 거의 다 되어가고 있었고, 멕시코와의 축구경기가 신경쓰이긴 했지만 떠난다는 들뜬 마음과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 대한 댓글을 챙기느라 탑승시간이 후다닥 다가와 버렸다.

비행기를 타기 위해 셔틀을 타고 탑승구간으로 이동해 비행기에 올랐다. 태우와 내 가방을 짐칸에 올리면서 여행기간 동안 읽을 책(이상호 기자의 X파일, 안철수의 생각)들 중 이상호 기자의 X파일을 의자수납칸에 꺼내넣고 출발준비를 마쳤다. 태우는 비행기 의자에 붙은 타블렛을 통해 게임에 열중하고 있다. 이번 여행동안 되도록 잔소리하지 말아야지라고 다시금 다짐하고 비행기 안을 둘러본다. 한국사람 참 많다. 애들도 많다. 우리나라 참 살기 좋아졌단 생각이 다시금 든다. 

비행기가 이륙한다. 귀가 먹먹해지고, 침을 꼴깍 삼키니까 다시 귀가 뚫린다. 책보다 자다를 반복하다 보니 잠시 후 이스탄불 아타튀르크 공항에 도착한단다. 떨린다. 출국수속을 받고 밖으로 나왔다. 화물찾는 곳으로 가서 캐리어를 찾고, 우선 급하게 사용할 50달러만 환전했다. 공항철도 이정표를 찾았다. 공항메트로 전철을 타러 내려갔다. 아직 새벽 5시도 안된 시간. 전철역 입구는 굳게 닫혀있고, 사람들은 그 앞에 셔터 올라가기만을 기다리며 모여있다. 더워도 건조할 거란 나의 기대와는 달리 이스탄불은 덥고 습했다. 지금 서울 날씨와 별반 다를게 없다. 5시가 되자 셔터가 올라간다. 나는 준비된 매뉴얼대로 제톤(전철과 트램을 탈 수 있는 토큰) 4개를 샀다. 1.5리라로 알고 있었는데 그사이 2리라로 올랐다. 10리라를 넣고 대충 짐작가는 버튼을 눌러 개수를 4로 늘렸다. 제톤 4개가 나오고 2리라가 거슬러져서 나온다. 상식대로 제톤을 넣고 공항전철을 탔다. 관광객이 낯설지 않은지 터키사람들은 우리를 별로 의식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신기해서 두리번 두리번...여기 저기 관광객으로 느껴지는 무리의 사람들이 보인다. 우리는 준비된 매뉴얼대로 10여분 좀 넘게 달려서 [제이틴브루느 역]에 도착해서 도심셔틀 비슷한 트램으로 갈아탔다.

트램은 도심철도답게 작고 스마트해 보였다. 인도와 건물들 바로 옆을 지나가는게 생소하고 신기해 보였다. 그리고 트램이 다니는 길로 일반 자동차들도 똑같이 다닌다. 레일이 위로 튀어나와 있지 않아서 가능해 보인다. 여하튼 신기하다.

도심의 느낌은 중세 유럽의 어느 한 도시에 와있는 느낌이다. 고풍스런 느낌의 아름다운 건물들과 유럽스러움의 오가는 사람들... 낯선 나라 낯선 도시에 왔다는 느낌이 물씬 든다.

호텔에 체크인 하고 짐을 풀어놓은 후, 아직 이른 시간이지만 호텔밖으로 나왔다. 아직 익숙하지 않은 건물과 도로들... 그리고 그 위에 오가는 낯선 사람과 자동차... 익숙하게 보여지는 장면들이 아니기에 함께하는 아들 태우보다 나의 긴장감과 흥분도는 평상심을 깨고 있었다.

4년 전 아무런 근거도 없이 터키를 가겠다고 선언하게 만든 그 이끌림이 무엇일지 몹시 궁금해졌고, 뭔가 있을거라는 강한 확신이 밀려오고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8박 10일 동안 느껴본 터키는 여행자들을 실망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새로운 여행지마다 돋아나는 감성코드가 다르고, 내 입에 붙어있는 형용사가 달라진다. 똑같이 아름다운 자연인데, 이렇게 다양할 수 있을까..하는..ㅎ

하지만 나를 반성하게 하는 것도 분명 있었다. 터키여행은 나에게 큰 계획이었다. 많은 것들을 집중시켜야하는... 그런데 여행을 하면 할 수록 내 가까이에 있는 것들도 제대로 느끼지 못했으면서 멀리 가서 감동을 찾는구나하는 자책. 이스탄불 여행을 하면서 그들의 왕이 살던 궁을 관람하고, 그들이 그들의 신에게 예배하는 사원을 관람하면서 내나라 서울에 있는 그 아름다운 궁들은 나는 이런 정성으로 보았던 적이 있나? 하는 나를 향한 질타... 카파도키아와 파묵칼레의 천연 자연경관을 보면서 우리나라 금수강산의 아름다움에 얼마나 매료되었었던가..하는 그리고, 에게해의 바다를 보며 신비감에 젖었다가 우리나라 바다도 그 못지 않게 아름다운데 하는 아픈 마음, 마지막으로 에페소의 고대유적을 보며 느끼는 허망함... 좀 더 내 가까이 있는 것들에 정성을 다하리라하는 어설픈 애국적 감상이 마음껏 일어났던 여행이었던 거 같다. 그래서 내년 여름은 서울 구석구석 누비기로 잠정적 계획을 세웠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터키는 참 매력적인 나라다.

**이후 각론으로 들어가서 아래 순서대로 여행기를 적어볼까 합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
[아빠와 아.들.]터키여행을 다녀와서(2) 이스탄불 편
[아빠와 아.들.]터키여행을 다녀와서(3) 카파도키아 편
[아빠와 아.들.]터키여행을 다녀와서(4) 파묵칼레 편
[아빠와 아.들.]터키여행을 다녀와서(5) 에페소 편

Posted by 다울의 꿈

 

  꼬박 4년이 되었다. 아들과의 터키여행에 대한 꿈을 세운지가...
2년 전 시도하다가... 사전정보 부실로 1년 연기했다가, 막둥이 효원이의 출산으로 또 미뤄진...
그리고 드디어 2012년 효원이의 돌잔치로 자금압박이 밀려왔지만, 태우가 6학년이라는 마지노선이 계획을 강행하도록 했다.

  실행계획은 올 2월 예약을 하면서 시작되었다.
  배낭여행...비행기와 숙소만 여행사를 통해 예약하고...
  나머지는 자유여행~

  지난 주 오리엔테이션을 다녀오고 난 잠시 멘붕상태였다.
"간다!"라는 명제만 세워놓았지 아무런 디테일이 없었기에, 서바이벌을 위한 최소한의 준비조차 없었기에 걱정이 앞섰다. 가이드없이...맹목이지 않을까..하는 우려..

  그리고 그림을 그렸다. 상세하게...(첨부된 pptx)
  여행사에서 준 일정을 토대로 "타임라인에 따른 이벤트"들을 파워포인트로 그리고, 코멘트를 달았다.
그림을 그리니까, 궁금한게 생기고, 그걸 여행사에 문의해 빈 칸을 채웠다. 그러고나니까... 이제서야 설레인다. 즐길 준비가 끝났다.ㅎ

오늘밤(2012년 7월 26일 늦은 11시 50분 터키항공) 인천을 통해 터키 이스탄불로 날라간다. 비행시간 11시간...

[이스탄불 2일] => [카파도키아 2.5일] => [파묵칼레 1.5일] => [쿠사다시 1일] => [셀축(에페소) 1일]
=> [이스탄불->인천] 로 이어지는 8박 10일의 일정

- 한국을 좋아하는 터키에 매료되고 싶다.
  (카파도키아에서의 트래킹과 초대교회의 모습들 / 파묵칼레의 석회온천(이게 터키로 나를 이끈 20년 전 임팩트) / 이스탄불에 널려진 중세의 흔적들 / 지중해와 에게해의 아름다움)

- 아들과 온전히 소통하고 싶다.
  : 학교에서 교회에서 칭찬받고 온전히 자기의 역할을 다하지만, 집에서는 엄마아빠의 기준에 따라 자주 혼나고, 지청구 먹고, 또 장남이기에 먼저 혼나는 아들과 눈높이를 맞추어 대화, 소통하고 싶다. 사춘기에 접어드는 아이가 자기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사랑과 나눔, 베품의 삶을 살 수 있는 큰 마음의 어른이 될 수 있는 호연지기를 배우고 왔으면 좋겠다. 그래서 난 이 귀중한 열흘 동안 아들의 관심에 귀 기울이고자 한다.

- 대자연 앞에, 또 그것을 만드신 하나님 앞에 겸손해지고 싶다.
  : 사진으로만, 글로만, 영상으로만 보았던 카파도키아의 기암괴석들, 파묵칼레의 천연 석회온천... 가서 보기만 해도 날 숙연하게 할 것이다.

  많은 것을 무리해서 출발한다.
  아내는 무더운 여름, 돌지난 꼬맹이와 씨름해야 한다. 그나마 내가 퇴근하면 아이로 부터 해방되었는데, 앞으로 10일은 꼼짝마라다...
  토요일에 도착하고자 목요일 출발한다. 금요일은 아무 일 없으리라는 전제하에 직원들에게 서점과 복사실을 부탁하고... 다행히 지지부진하던 논문이 일정 안에 끝나긴 했는데... 아직 찾아가지 않은 사람들... 연락을 다 취했지만...ㅎ
  하지만 돌아올 때는 더 많은 감사로 나를 채우고 돌아와 내가 서 있는 자리들에서 그 에너지를 나눌거다.ㅎ

[터키여행에 대한 첫마음 2008.07.18]      

[터키여행 목표 정하기 2009.5.16] 

터키일정.pptx

Posted by 다울의 꿈
2008년 가을...
지금의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면서, 아들과의 목표를 하나 정했다.
태우가 4학년 되는 때부터 아빠랑 공유할 수 있는 여행경험 쌓기...

첫 번째이기에 쉽게 시도할 수 없는, 많은 준비가 필요한 것으로 정하기로 했다.
그 당시 태우는 초등 2학년이었고, 2년이란 시간이 남아있어서 스케일을 키워보고 싶었다.

그때 내 심장은 나에게 터키에 가보라고 권했다.
그리고 나는 서슴없이 터키를 나와 태우의 Hard Travel Course로 낙점하고, 거꾸로 터키에 가야 하는 이유를 찾기 시작했다.

나름 괜찮은 방법이라 생각한다.
이런저런 이유로 저기를 하고 싶다가 가장 많이 선호되는 것이지만, 저길 가고 싶어서 이런 저런 정보를 찾다보니 정말 더 가고 싶게 되었다고 괜찮은 결론 도출방법이라 생각한다.
자료와 정보를 찾는 중에 내 맘에 내키는 정보가 낚이지 않으면 다른 행선지를 알아보면 되니까...

여하튼 터키는 왜 그런지 모르게 내 마음이 끌렸다.
그래서 지금 터키를 공부하며 가야 하는 이유와 목적을 정의하고 있다. Mission Statement!!!!

우선 터키에 대한 정보를 찾으면서 드는 첫 번째 이끌림은 "미안함"이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터키의 한국에 대한 One Side Love의 미안함이다.
주워들은 정보에 의하면 터키인들은 우리나라를 "형제의 나라"라고 생각하고, 다른 여타국민에 비해 무지 친절하게 대한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터키에 대한 애정이 그리 없다. 역사에서 너무 멀어있고 무관하기에 친밀감 "0"의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래 저래 자료를 보다 보니 그네들과의 역사는 1천 년을 훌쩍 뛰어넘어 고구려 시대, 연개소문 시대 즈음 열애를 하고 있었다 하고, 터키인들은 그 당시 우리 고구려와의 관계를 역사시간에 배우며 우리나라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을 유지하고 있다하니... 부끄럽다. 나 또한 터키가 돌궐이었으며, 우리와 함께 수나라에 대항하여 싸운 동맹국이었으며, 연개소문이 돌궐의 공주와 결혼하여 피를 나누었다고 하는 역사적 사실을 근자에 들어서야 알게되었으니 부끄러울 따름이다. 그 미안함을 씻고파서 터키를 가야 한다. 가서 나도 아니, 우리나라도 너희들을 형제라고 생각한다며 그들과 진지한 대화와 허깅을 하고 돌아오고 싶다.

터키를 가야하는 두 번째 이유는 "파묵칼레"이다.
한 20년 전 우리 목사님께서 첫 번째 성지순례를 다녀오시고, 찍어온 사진 속의 장면을 잊지 못하고 있다.
그 때는 석회암으로 둘러싸인 노천온천인데, 참 특이하고 저기로 휴가, 여행을 다녀오면 참 좋겠다는 좋은 인상 정도였는데, 터키 정보를 찾다보니 거기가 터키 내륙에 있는 파묵칼레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또 어느 터키여행 책에 소개된 그 지역 사람들과 호텔 이야기를 읽으며 정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파무칼레를 가게되면 난 거기서 태우와 반나절 정도를 온천하며, 책 한 권정도 읽으며 시간을 소요하고 싶다.

그 다음 터키가 끌리는 이유는 "지중해"이다.
왠지 낭만적이고, 왠지 모를 아름다움이 존재할 것 같은 지중해를 보고 싶다. 수많은 역사적 발자취가 살아있는 실크로드와 이스탄불, 그리고 아름다운 지중해... 거길 가고 싶다.

마지막으로 떠 오르는 생각은 "바울의 발자취와 초기 기독교의 성지"를 보고 싶다.
이게 첫 항목일지 마지막 항목일지 잠시 고민되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마지막 항목으로 두고 싶다.
차후 진짜 성지순례를 가게될 때는 첫 항목이 되겠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성지순례는 옵션이기 때문이다.
에베소나 많은 기독교 유적은 나와 태우의 발품을 파는 범위 내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터키 여행의 목적을 다시 정리하자면...
1. 형제의 나라 터키에 대해 좀 더 친밀해 지기(그들의 정치,경제,역사 등) : 형제에 대해 많이 알기
2. 터키만이 가지고 있는 자연환경 및 문화유적 즐기기(지중해, 파묵칼레, 블루모스크, 그랜드 바자르, 카펫 등)
3. 초대교회 및 바울의 흔적 만나기


이렇게 거창하게 선언하고 보니, 한 달 정도를 여행을 하고 와야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고 있는 일정은 9일 ~ 10일 정도...
여행사를 통하지 않고, 발품 팔아 돌아다닐 생각이니 아주 치밀하지 않으면 많은 시간이 허비될 것이고, 현지에서 발생할 돌발상황들을 생각하면 변수가 많으리라 생각한다.
많은 비용을 들여 여행을 갔기에 최대한 본전을 뽑기 위해 많은 좋은 것을 경험해 봐야하겠지만, 위의 3가지 목적은 여행을 좀 더 가치있게 하기 위한 Objects일 뿐이고, 최상위의 Goal은 태우와 아빠의 공통경험 만들기와 소통에 있다. 의식이 커 가는 아들과 지속가능한 소통을 만들어 내는 것이 터키 여행에 기대하는 아빠의 작지만, 소박하지만, 쉽게 손에 넣을 수 없는 원대한 꿈이자 목표이다.
Posted by 다울의 꿈

현재의 몽고 초원에 거주했던 유목민은 옛부터 늘 중국의 안보를 심각하게 위협했다. 이들에 관한 기록은 대체로 중국측이 남겨 놓았고 유목민 스스로 남긴 기록은 매우 적다.


  B. C. 221년 중국이 춘추전국시대의 분열을 끝내고 진秦에 의해 통일되었을 무렵, 흉노족이 유목국가를 건설했다. 시황제가 장군 몽염을 보내어 격퇴시켰으나 곧 세력을 회복하였고, 진을 이은 한나라는 무력의 열세를 어찌할 수 없어 조공으로 평화를 유지했다. 한 무제(武帝, 재위 B. C. 140~87)의 10년에 걸친 대규모 원정으로도 이들을 뿌리뽑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내분으로 2차에 걸쳐 흉노가 분열하여 중국은 한동안 우월한 입장을 누렸다. A. D. 3세기에 들어와 크게 다섯 계통의 유목민 집단이 중국으로 이주, 이른바 5호 16국 시대가 열렸다. 이중 선비족이 세운 북위北魏가 강북을 통일하였고(439) 강남 지역은 한족漢族이 세운 여러 왕조가 명맥을 이었다. 이러한 남북 분열 상황으로 후세에 이때를 남북조 시대라 부른다.


  중국의 남복조 시대에는 몽고 계통의 유목국가인 유연(柔然, 또는 茹茹로도 표기)이 북조를 위협하였다. 6세기 중반 유연에 신속臣屬한 유목부족의 하나였던 투르크 계통의 돌궐突厥이 흥기, 유연을 격파하고(552) 초원의 패자가 되었다.


  한자 표기인 돌궐의 정식 명칭은 돌궐 비문에 따르면 '쾩-튀르크(Kok Turk)' 로 하늘(Kok) 에 속한 신성한 투르크란 의미를 가진다. 이로부터 투르크가 정식 종족명으로, 또한 국명으로 사용되었으며 오늘날까지 지구상의 다양한 투르크 계 종족이 연대 의식을 가지고 있다.


  돌궐 제국의 창건자는 부민(Bumin, 土門)으로 그가 돌궐 부족 연맹의 지도자로 부상하고 집권하기까지의 과정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가 중국 사서에 등장하는 시기는 535년이다. 545년 중국의 서위西魏와 동맹 관계를 맺은 그는 유연에 대해 유연의 공주와의 혼인을 요구했다. 이는 유연에 대한 노골적인 도전의사였다.

 

유연이 거절하자 부민은 서위의 공주를 맞아들이고 552년초 서위와 연합하여 유연을 멸망시켰다. 이때 부민은 일 카간(Il- Qagan, 伊利可汗) 이란 호칭을 쓰면서 초원의 지배자임을 공언하였다. 그러나 그 해에 사망하였다.


  일 카간의 사후 관습대로 형제와 자식들에게 제국이 분배되었다. 돌궐 제국의 서부 지역은 일 카간과 함께 정복전에 참가해 공이 큰 동생 이스테미(Istemi, 室點密)가 계속 통치하였다. 동부 지역의 통치권은 일 카간의 아들 콜로(Kolo, 科羅)가 승계했다가 일찍 죽어 아우인 무한(Mukhan, 木杆,)이 553년 새로운 카간으로 즉위했다.


  돌궐 서부 지역의 이스테미는 카간 대신 야브구(Yabgu, 葉護 ; 제 2왕) 칭호를 사용하여 동부 지역에 대한 하위 개념을 분명히 했다. 이스테미 야브구는 서쪽으로 영토를 계속 확장했으며 동로마와 페르시아의 사산 왕조와 교류하였다. 에프탈리테 부족이 실크 로드의 중개 무역을 장악하자 이스테미 야브구는 사산 왕조와 합동하여 에프탈리테를 멸하였다(557). 이 지역은 아무 강(지금의 Oxus 강)을 경계로 분할되었다.<#TAG>   돌궐 비문의 하나인 퀼 테긴 카간의 비문에는 돌궐의 초창기 정복 활동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위로 푸른 하늘과 아래로 적갈색 땅이 창조되었을 때, 그 둘 사이에 사람이 창조되었다. 사람들 위에는 나의 조상 부민 카간과 이스테미 카간이 보위에 앉았다. 보위에 앉아서 돌궐족의 국법을 잡아 주었고, 세워주었다.

 

사방은 모두 적이었다. 오만한 자들을 머리 숙이게 하고 힘있는 자들을 무릅을 꿇게 하였다. 동쪽으로는 카디르칸(흥안령 산맥) 까지 서쪽으로는 철 문(鐵門 ; 트란스옥사니아) 까지 (부족민들을) 자리잡게 하였다. 두 (경계) 사이에서 아무런 조직도 없이 (살았던) 쾩 투르크(Kok Turk) 인들을 수습하여 그렇게 다스렸다.


  [그분들은] 현명한 군주들이었다. 용감한 군주들이었다. 지휘관들도 정녕 현명하였다. 정녕 용감하였다. 지배층도 부족민들과 분명 평화와 조화 속에 있었다. 그리하였기 때문에 나라를 그렇게 잘 다스리었다. 나라를 다스리고 법을 세웠다.

  동부 지역의 무한 카간은 555년 유연의 잔존 세력을 소탕하고 그 부근의 여러 유목 부족을 병합하였다. 더 나아가 동쪽의 거란을 복속시키고 고구려를 침공하였다.『삼국사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가을 9월, 돌궐이 신성新城을 포위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자, 군대를 이동하여 백암성을 공격하였다. 왕이 장군 고흘高紇에게 군사 1만을 주어 그들을 물리치고, 1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신라가 침공하여 열 개의 성을 빼앗았다.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陽原王 7年)

  『삼국사기』에 나오는 삼국의 대외관계는 대부분 중국 사서를 인용한 것이다. 그러므로 삼국과 중국의 관계는 모두 조공관계로 묘사되었다. 이에 비해 돌궐과의 충돌을 전하는 이 기록은 중국 사서에 나오지 않는 고유 기록이다. 이 해는 551년에 해당하며 고구려가 신라·백제 연합군에 의해 한강 유역을 상실한 해이다.

 

그러나 돌궐의 성장과정을 추적해 보면 551년에 고구려를 공격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삼국사기』의 기록은 551년 이후에 있었던 사실을 전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TAG>   고구려와 돌궐의 전쟁은 중국의 기록에 단편적으로 나온다. 그에 따르면 고구려는 말갈 부족과 더불어 돌궐을 격파했다.

 

돌궐의 고구려 침공은 처음에는 돌궐이 유연의 잔여 세력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듯 하다. 6세기 말~7세기 초 활동하였던 동로마 역사가 시모카테스Simokattes는 유연의 잔여 세력이 중국(북제)으로 도주했고 그곳에서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가 쫓기어 동쪽의 Moukri(고구려)로 갔다고 기록했다.

 

그는 Moukri는 "중국에 인접해 있다. Moukri인들은 위험에 대처하는 강인한 정신력과 매일매일의 신체단련으로 그들의 투지는 매우 높았다" 고 하였다. 동로마 제국은 돌궐과 비단을 매개로 교류하였던 관계로 돌궐을 통해 고구려에 대한 지식이 전해졌고, 이로 인해 동로마 문헌에 이러한 기록이 남았다 (568년 돌궐의 사신이 비잔티움에 도착한 것이 최초의 접촉이었다).


  '고구려인들은 … 매일매일의 신체단련으로 그들의 투지는 매우 높았다' 라는 동로마의 기록은 중국의 역사서인『구당서舊唐書』에 나오는 기록과 일치한다.

  각 거리마다 큰 집을 지어 경당 堂이라 부른다. 자제子弟들이 결혼할 때까지 밤낮으로 이곳에서 독서와 활쏘기를 익히게 한다. (『구당서舊唐書』「동이 열전」고구려)

  고구려로 이주한 유연으로 말미암아 돌궐과 고구려 사이에 전단(戰端)이 일어났을 가능성은 충분히 상정해 볼 수 있다. 또한 고구려와 돌궐은 두 나라 사이에 있는 거란족과 말갈족을 복속시키려는 과정에서 충돌하여 오랬동안 적대국으로 지냈다. 중국 역사서에서 단편적으로 이러한 모습이 보인다.

  … 왕년에 이계찰(利稽察)이 고구려·말갈에 크게 격파되고 … (隋書, 突厥傳)

  이 기록은 돌궐이 고보녕(高保寧 ; 북제 말기에 영주자사가 되었고, 북제가 멸망하자 북주와 그 뒤를 이은 수에 투항하기를 거부하고 독립세력으로 있었음)과 연합하여 581~582년에 수를 침입, 수군을 격파하자 이에 격분한 수 문제 양견이 582년에 내린 조서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계찰(利稽察)에서의 '察'은 돌궐의 관직명 '샤드(Shad)'를 뜻하며 設, 殺, 煞로도 표기된다. 돌궐 제일 제국에는 28관등이 있었는데 Shad는 야브구(Yabgu, 葉護 ; 제 2왕)다음의 제 2관등이다. 이 자리는 돌궐 왕족에게만 주어지는 것으로 그 직능은 '別部領兵者' 로 부족을 거느리면서 부족민을 지배하였다.

 

 고구려가 돌궐의 이계찰을 격파한 것은 돌궐의 동진을 성공적으로 막았음을 보여주는 일이다. <#TAG>   북위는 534년 동서로 분열되고 동위東魏와 서위西魏는 각각 북제(北齊, 550년 건국)와 북주(北周, 557년 건국)로 이어졌다. 이러한 중국 북조의 내분기에 건국한 돌궐은 유연과 달리 북조에 우월한 지위를 누렸다(북위에 눌렸던 유연도 북위가 동서로 분열하자 잠시동안이나마 우위를 누렸다).


  돌궐은 건국 무렵부터 서위와 동맹관계였고 서위를 계승한 북주와도 동맹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돌궐은 늘 창구를 열어 놓았고 돌궐을 중립화 내지 자기편으로 만드려는 북제의 헌상을 받았다. 이에 따라 북주도 부지런히 헌상을 하였고 북주의 태조는 무한 카간의 딸을 황후로 맞이하는 굴욕을 자청하였다(565).

 

당시의 외교 관례상 외국 공주를 후궁이 아닌 황후(皇后)로 영입하는 것은 하위 신분임을 공식 천명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연이 강성할 때 처음에는 서위가, 나중에는 동위가 유연의 공주를 각각 황후로 맞아들인 것은 유연의 세력을 이용하여 상대를 제압하려는 궁여지책이었다. 북주와 북제는 서로 돌궐 공주를 맞아들이려 다투다가 북주가 승리를 거두었다. 분열로 열세에 놓인 중원 국가들이 스스로 굴욕을 자청한 셈이다.

  돌궐 제국의 위세를 떨친 무한 카간은 572년 사망했다. 그의 공적과 당시 국제사회에서의 위상은 돌궐 비문에 잘 나타나 있다.

  사방에 군대를 보내어 모든 종족을 복속시키고, 머리를 가진 자는 머리를 숙이게 하고, 무릅을 가진 자는 무릅을 꿇게 하셨도다. 앞(동)으로는 킨칸 산맥에, 뒤(서)로는 철문(鐵門) 에 이르기까지 돌궐 민족이 지배하는 돌궐 국가가 되었다. 그는 현명한 군주였다. 용감한 군주였다. 신하들과 귀족, 백성들도 모두 현명하고 용감하였다. ― 외투켄에서 거행된 그의 장례식에는 사방의 국가와 종족이 모두 슬퍼하며 조문 사절을 보냈다. 중국, 티벳, 비잔틴, 아바르(유연), 거란 그리고 고구려 등등 ―

  무한 카간을 이어 그의 동생인 타파르(Tapar, 陀鉢, 재위 572~581)가 카간이 되었다. 그의 즉위후에도 한동안 돌궐의 중국의 북조에 대한 우위는 유지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주서周書』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당시 제나라와 교전할 때라 해마다 군대를 동원하였기 때문에 매번 돌궐과 연결하여 외원으로 삼았다. …… 이래 그 나라는 부강하여 중국을 능멸하려는 뜻이 있었다. 조정은 화친을 맺고도 해마다 십만필을 주었으며 수도에 있는 돌궐인을 모두 후히 대접하니 비단옷을 입고 고기를 먹으며 (호화스럽게) 사는 자가 수천명이었다.

 

 제나라는 그들의 침략이 두려워 역시 나라 살림을 기울여 증물贈物을 보냈다. 타파르(陀鉢)는 더욱 교만해져 그 부하들을 거느리며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즉 "우리에게 남쪽의 효순孝順한 두 아이 놈(북주와 북제)만 있다면 무었 때문에 재물이 없을 것을 걱정하겠는가?"<#TAG>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577년 북주가 북제를 합병하여 북중국이 통일되었다. 돌궐은 즉각 북제 부흥을 내걸고 북주를 공격하였다.

 

아직도 돌궐의 군사적 우위는 여전했으나 곧 이어 유목 국가에서 일어나기 쉬운 국가 분열이 일어났다. 일 카간의 동생으로 돌궐 서부를 다스리던 이스테미 야브구는 576년 사망하였다. 그의 뒤를 이은 아들 타르두(Tardu, 達頭, 재위 576~603)는 동부 돌궐의 종주권을 인정한 아버지와 달리 완전 독립을 추구했다. 우선 야브구 위에 오른 직후 타파르 카간의 통제를 단호히 거부하고 스스로 카간으로 행동했다.


  581년은 중국과 돌궐에 큰 전환점이 된다. 이 해에 동돌궐에서는 타파르 카간이 사망하고 계승분쟁이 일어났으며, 북주에서는 외척 양견이 제위를 찬탈하여 수를 건국하였다. 카간 자리를 놓고 타파르 카간의 아들 안로(Anro, 菴羅)와 조카인 탈로핀(Talopien, 大邏便)이 경쟁하였다.

 

 탈로핀은 처음에 타파르 카간에 의해 카간으로 추천되었으나 돌궐의 귀족 회의 (Toy)는 그의 모친이 돌궐계가 아니라는 이유로 카간 자격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안로가 즉위했으나 이번에는 탈로핀 측이 강력히 반발, 결국 타협하여 콜로 카간의 아들인 이쉬바라(Ishbara, 始波羅, 재위 581~587)에게 양위하였다.


  이쉬바라는 안로에게 제 2 카간 칭호를, 다로빈에게는 아파 카간(Apa Qagan) 이란 칭호를 주어 단결을 도모했다. 그러나 다로빈은 서부 돌궐의 타르두에게 가서 자신의 입지를 확보하려 했다. 이쉬바라의 하툰(可敦 ; 황후)은 북주의 천금(千金) 공주였는데 가문의 복수를 주장하는 그녀의 영향력으로 돌궐은 수와 교전하게 되었다.


  돌궐과의 전쟁은 수의 창업주 수 문제 양견(재위 581~604)에게 큰 위협이었으므로 돌궐 의 분열시키려 즉시 돌궐 서부의 타르두에게 접근하여 돌궐 카간으로 인정하였다. 이쉬바라카간은 중국과 돌궐 서부를 적으로 상대하는 부담을 안게 되었다. 이쉬바라는 우선 자신의 통치 영역에 있는 다로빈의 근거지를 초토화시키고 추종 세력을 소탕하였다.

 

 결국 582년 타르두가 동부 돌궐의 카간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선언하여 돌궐은 공식적으로 동서로 양분되었다. 돌궐은 분열되고 북중국은 통일되니 돌궐, 특히 동돌궐의 열세는 분명해졌다.


[출처]http://kin.naver.com/knowhow/entry.php?d1id=10&dir_id=10&eid=3IOJAl7G83fSknYfYtfG1G11RAseBkRo&qb=sO2xuLfBv80gtbmxyA==&enc=euc-kr&pid=fQj%2Fhloi5TGssZQd72Zsss--452232&sid=Sfa-YsGb9kkAAECaoxA
Posted by 다울의 꿈
'터키'하면 형제의 나라라는 수식어가 떠오르지만
실제로, 그렇게 불리어지는 이유를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6.25 때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병력을 파견했다고.

그렇다면 '왜?' 그렇게 많은 병력을 파견했는가.. 라는 질문을 하면 그들은 대답하지 못한다.
그건 궁극적인 이유가 될 수 없다.

터키인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투르크'라고 부른다.
우리가 코리아를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것처럼.

역사를 배웠다면 고구려와 동시대에 존재했던 '돌궐'이라는 나라를 알고 있을 것이다.
투르크는 돌궐의 다른 발음이며 같은 우랄 알타이 계통이었던 고구려와 돌궐은 동맹을 맺어 가깝게 지냈는데 돌궐이 위구르에 멸망한 후, 남아있던 이들이 서방으로 이동하여 결국 후에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건설하게 된다.

원래, 나라와 나라사이엔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는 법이지만 돌궐과 고구려는 계속 우호적이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서로를 '형제의 나라'라 불렀고 세월이 흘러 지금의 터키에 자리잡은 그들은 고구려의 후예인 한국인들을 여전히 형제의 나라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즉,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형제의 관계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의문점 하나.
우리는 왜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까?
그리고 터키인들은 왜 아직도 우리를 형제의 나라라고 부를까?

답은 간단하다.
역사 교과서의 차이다.

우리나라의 중,고 역사 교과서는 '돌궐'이란 나라에 대해 단지 몇 줄만 할애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돌궐이 이동해 터키가 됐다느니 훈족이 이동해 헝가리가 됐다느니 하는 얘기는 전무하다.

터키는 다르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경험했던 터키는 그들의 역사를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학교에서 역사 과목의 비중이 아주 높은 편이며 돌궐 시절의 고구려라는 우방국에 대한 설명 역시 아주 상세하다.
'형제의 나라'였다는 설명과 함께.
그래서 대부분의 터키인들은 한국을 사랑한다.
설령 한국이 그들을 몰라줄지라도..

실제로 터키인들은 한국인들 역시도 그들과 같은 생각을 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한국인들도 터키를 형제의 나라라 칭하며 그들을 사랑할 것이라 믿고 있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88 서울 올림픽 때 터키의 한 고위층 관계자가 한국을 방문했다.
자신을 터키인이라 소개하면 한국인들에게서 큰 환영을 받을 것이라 생각했으나 그렇지 않은 데 대해 놀란 그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물었다.

'터키라는 나라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돌아온 답은 대부분 '아니오'였다.
충격을 받고 터키로 돌아간 그는 자국 신문에 이런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한다.

'이제.. 짝사랑은 그만합시다..'

이런 어색한 기류가 급반전된 계기는 바로 2002 월드컵이었다.
'한국과 터키는 형제의 나라, 터키를 응원하자'라는 내용의 글이 인터넷을 타고 여기저기 퍼져나갔고 터키 유학생들이 터키인들의 따뜻한 한국사랑을 소개하면서 터키에 대한 한국인들의 관심이 증폭되게 되었다.
6.25 참전과 올림픽 등에서 나타난 그들의 한국사랑을 알게 된 한국인들은 월드컵을 치르는 동안 터키의 홈구장과 홈팬들이 되어 열정적으로 그들을 응원했다.

하이라이트는 한국과 터키의 3,4위전.
자국에서조차 본 적이 없는 대형 터키 국기가 관중석에 펼쳐지는 순간 TV로 경기를 지켜보던 수많은 터키인들이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한다.
경기는 한국 선수들과 터키 선수들의 살가운 어깨동무로 끝이 났고 터키인들은 승리보다도 한국인들의 터키사랑에 더욱 감동했으며 그렇게.. 한국과 터키의 '형제애'는 더욱 굳건해졌다.

우리는 이유를 알아야 한다.
터키가 형제의 나라가 된 궁극적인 이유를 모르면 KBS의 어느 아나운서가 패널이었던 터키인에게 '아우님'이라 불렀던 어리석은 짓도 가능한 것이다.
형제는 '형과 동생'을 따지자는 말이 아니다.
그들에게 형제는 곧 친구며 우방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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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의 언어에는 순우리말과 비슷한 단어가 참 많습니다.

말뿐 아니라 음식, 문화, 습성, 국민정서 (터키인 우월주의에, 감정적 다혈질이면서 반대로 다정다감하고, 거나하게 놀기 좋아하고, 어쩜 그렇게 성질 급한 것까지..)도 상당히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유럽인치고는 흔하지 않게 몽고반점도 있습니다.



과거 돌궐(투르크 => 터키)과 고구려는 그냥 우방이 아니라, 이와 잇몸 같은 관계였다고까지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돌궐의 공주와 결혼을 하였을 정도니까요.

고구려 멸망 후 돌궐도 망했으며 서쪽으로 옮겨 서돌궐을 건국하게 됩니다. 서돌궐이 훗날 오스만 제국... 그리고 터키가 됩니다.

혈통이 고구려와 혼혈이라고 생각하시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역사 교과서에서 돌궐을 다루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돌궐의 위치 때문이 아니였나 생각됩니다.
사서에는 고구려와 돌궐이 국경을 맞대고 있는 것으로 기술되어 있는데, 당시 돌궐은 중앙아시아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영토가 중앙아시아, 즉 실크로드(서안) 부근까지가 영토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리고 돌궐은 만주 지역에까지 영토를 넓힌 적도 없습니다.
따라서, 고구려의 영토가 만주와 한반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중앙 아시아 까지(돌궐과 맞닿은), 매우 방대했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중국이 동북공정에 더욱 박차를 가하는 이유도 여기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보면 '터키'라는 나라는 과거 청동기시대인 배달국, 고조선, 부여 시대에는 동이족에 속해 있다가 고구려의 세력이 확장되면서 고구려가 부여를 정벌하자 그곳에 살던 원주민(예맥 동이족)들이 요하를 건너가 이루게된 민족입니다.

돌궐족은 중국의 대부분을 수나라가 통일하자 고구려와 돌궐은 연합하여 수나라를 공격하게 됩니다. 그러나 오히려 수나라의 침략을 받아 요서지방은 수나라에 점령되고 돌궐은 서쪽으로 쫓겨나게 되는데 그들이 서쪽으로 이주해 정착하여 오스만-투르크 제국을 건설하였고, 아랍과 발칸반도를 지배하며 강성했던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19세기 중반부터 쇠퇴하면서 주변의 영토를 잃고(소수민족 모두 독립) 지금에 터키만 남게 된 것입니다.

같은 우랄-알타이 계통의 언어를 사용했지만 통일신라시대 이후 우리는 중국의 영향으로 한문을 사용했고, 터키는 아랍의 영향을 받아 언어는 전혀 다르게 발전하게 됩니다.


유전학이나 인류학적으로도 터키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몇개 안되는 북방계 몽골리언국가(몽고, 한국, 일본, 에스키모, 인디언) 중 하나로, 헝가리 와 함께 북방계 몽골리언의 유전자가 많이 남아있는 유럽국가입니다.

터키인은 '코리아'의 어원이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의 영문표기라는 것까지도 알고 있습니다. 대단한 형제사랑이지요..

그렇다면, 북한도 같은 민족인데 어째서 한국과 형제인 터키가 6.25 때 남한편에만 병력을 파병했을까..

한국과 일본의 관계만큼이나 아르메니아인들과 터키는 견원지간입니다. 아니, 원수지간이라는 말이 더 적절하겠네요.

과거 아르메니아인(오스만 기독교인들)들이 터키인(투르크 이슬람교도)에게 대학살을 당했기 때문이지요.

과거 오스만터키에서 소수민족들이 독립을 하면서 쇠약해진 국력과 맞물린 굴절된 민족주의로 말미암아 아르메니아인 수천명이 죽임을 당하는 1차 대학살의 참사가 벌어집니다.
유럽으로 남진하려하는 러시아의 힘을 얻어 루마니아와 세르비아가 독립을 하게되고 오스만터키의 아르메니아 영토 대부분을 러시아가 차지하는 셈이 되자 이에 분노한 투르크인들이 러시아와 붙어먹은 아르메인들을 표적으로 인종청소라는 대학살을 감행한거죠.

1차 대학살 20년후 또 다시 오스만터키 정부의 도움을 받은 투르크 이슬람교도들은 아르메니아인 5만명에 대학살을 자행합니다. (2차대학살) 게다가 정부는 학살된 아르메니아인 외 175만명을 추가로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로 추방하고 그 추방하는 과정에 60만명이 사막에서 목숨을 잃게 됩니다.

(1894년~1915년까지 250만명이였던 아르메니아인은 30만명만이 살아남게 됩니다.)

그후 1912년 발칸전쟁 때 몬테니그로, 불가리아, 그리스가 오스만터키에서 독립할 때도 알게모르게 러시아가 개입하여 아르메니아인을 도와줍니다. 따라서 러시아가 북한을 지원하기 때문에 당연히 터키는 그 반대 쪽인 남한에만 병력을 파견한 거지요.



물론 혹자는 당시 터키가 미국과의 우방적 연계로 말미암은 국제적 이득을 노린 선택일 뿐이였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역사의 흐름이라는 큰 범주에서 바라본다면,
터키가 2차 세계대전 때 우리의 동맹국 중의 하나였던 이유가 필연적으로 러시아와 적대 관계일 수 밖에 없는 과거사 때문이였다고 보는게 타당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형제의 나라..

한국의 경제성장을 자기일처럼 기뻐하고 자부심을 갖는 나라, 2002년 월드컵 터키전이 있던 날 한국인에게는 식사비와 호텔비를 안받던 나라.. 월드컵 때 우리가 흔든 터키 국기(國旗)가 터키에 폭발적인 한국 바람을 일으켜 그후 터키 수출이 2003년 59%, 2004년 71%나 늘어났다는 KOTRA 통계가 있습니다.

이런 관계를 지닌, 자기 나라로부터 수백만리 떨어진 곳에서 보내는 의리와 애정을 받는 나라가 세상에 몇이나 되겠습니까.
Posted by 다울의 꿈
터키에 살며 관광가이드를 하면서 현장에서 직접 습득한 실용 터키어를 한국인들이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엮은 터키 회화 교재. 책의 뒷부분에는 터키의 유명 명소들을 간단한 사진과 함께 소개하고 있으며, 책의 마지막 부분에는 본인의 사진을 넣을 수 있는 미니 앨범을 삽입해서 터키에서의 아름다운 추억들을 함께 간직할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포켓북 사이즈로 휴대가 용이하다. [예스24 제공]

작가 소개
저자 | 김현옥
1987년 단국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후 영국에서 관광 가이드로 활약하였다. 1998년 터키로 이주하여 여행업계에 종사하다가 2005년 한국 외국어 대학교 터키어과 3학년에 편입하였다. 현재도 터키와 한국을 드나들며, 학업과 가이드 일을 병행하고 있다. '터키', '이스탄불', '카파도키아', '파묵칼레', '에페스' 등 터키에서 발행된 터키 관광 관련 책자를 다수 번역하였다.
[모닝365 제공]

목차
터키어 알파벳
이 책의 사용방법

01 기본 회화
02 공항에서
03 호텔에서
04 인터넷, 우편 및 전화
05 은행 및 환전소에서
06 교통
07 쇼핑센터에서
08 음식점, bar에서
09 건강, 병원, 약국
10 도난, 분실
11 관광지에서
12 관용어구
13 터키에 관한 간단 정보
14 전화번호
15 비상시 연락처
16 관광지
-이스탄불
-앙카라
-카파도기아
-안탈리야
-파묵칼레
-셀축
-트로이
-사프란 볼루
-넴루트
Posted by 다울의 꿈
어서오십시오 터키로
터키는 태양과 바다,산,호수등 풍요로운 자연의 혜택으로 방문하는 사람들을 일상생활의 스트레스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낙원입니다. 4월부터 10월은 기후도 좋아 모래사장에서 유유자적하거나 산이나 호수로 행락을 가기에 최적의 시기입니다.
터키에는 긴역사가 있고 13이나 되는 문명이 남긴 역사적유산의 보고입니다. 터키를 방문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 위대한 과거의 유산에 접할 수 있습니다. 터키를 단 한번의 여행으로 이야기하기에는 불가능합니다. 방문할때마다 새로운 발견이 있고 반드시 다시 방문하고 싶어질것 입니다. 그리고, 제각각 형태는 다르지만 터키를 여행하면 이 개성적인 나라의 친절하고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사람들과 만날수 있을 것입니다.
지 리
터키의 면적은 814,578평방 킬로미터입니다. 유럽쪽과 아시아쪽은 보아즈이치(보스포러스해협), 마르마라해,차낙칼레(다르날레스해협)에 의해 나누어져 있습니다. 아나톨리아는 동부에 펼쳐진 고원지대로 디즐레(Dicle)(티그리스),프라트(유프라테스)를 시작으로 15개의 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또, 호수도많으며 그중에서도 반호수와 같이 내해에 필적할 정도로 큰호수도 있습니다. 북부에는 흑해와 평행을 이루고 달리는 산맥이 있고, 남부에는 토로스산맥(Taurus Mountains)이 해안을 따라 비옥한 평지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터키의 기후는 지역에따라 다릅니다. 온난한 흑해연안과 대륙성 기후의 내륙부, 지중해성 기후의 에게해와 지중해 연안부등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삼면이 바다인 터키의 해안선은 무려 8,000킬로에 달합니다.
역 사
터키는 「문명의 발상지」라고 일컬어져 왔습니다. 긴 역사를 가진 터키를 여행하면 이말의 의미를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신석기시대인 기원전 6,500년에 차탈허유크 최초의 부락이 만들어졌습니다. 차탈허유크시대에서 현재까지 몇세기에 걸쳐 번영했던 화려한 문화는 현대문명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핫티, 히타이트, 프리기아, 우라르투, 리시아, 리디아, 이오니아,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로마, 비잔틴, 셀추크, 오스만은 터키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고대유적은 나라 곳곳에 산재해 있으며, 제각각 문화의 특징이 있습니다.
근대사도 흥미깊은 역사의 일부입니다. 오스만제국이 쇠퇴한후 무스타파·케말·아타튀르크는 1923년 10월 29일에 터키공화국을 건국하여 평화와 안정으로 비약적인 경제발전과 철한 근대화를 실현하였습니다. 변화와 성장 속에서 「국내에 평화를, 세계에 평화를」을 모토로 터키는 지금도 계속해서 발전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인 구
1995년 조사에 의하면, 터키의 인구는 6252만6천명이며,41%가 농촌지역에 살고 있습니다. 주요도시의 인구는 이스탄불(740만명), 수도 앙카라(320만명), 이즈미르(270만명), 아다나(190만명), 안탈야(110만명), 부루사(160만명)입니다.
언 어
터키의 언어는 우랄알타이어족에 속하며, 핀 헝가리어와도 유사합니다. 터키어는 라틴문자로 표기되며, 전세계중 1억5000만명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터키어 강좌를 수강하고 싶은 경우는 아래로 연락하시기 바랍니다. ?Turkce Ogretim Merkezi(터키어 교육센터) Ziya Gokalp Cad.,No:18/1,06650 Kizilay-Ankara Tel:(312)435 97 81(6회선)갂Fax:(312)433 81 90-435 83 97
종 교
터키에서는 인구의 99%가 이슬람교도이지만, 이슬람 이외의 신앙의 자유도 보장되어 있습니다.
경 제
관 광 : 최근들어 터키는 유럽의 중요한 관광지가 되었습니다. 여름/겨울의 휴양지개발이 급속하게 진전되어 역사, 문화, 아름다운 자연을 찾아 전세계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해마다 늘어나고 있습니다. 지중해에서의 해수욕에서 울루다(울루산)에서의 스키까지, 터키에서는 제각각의 즐거움이 있습니다.
농 업 : 터키 경제에 있어서 농업은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주요작물은 밀, 쌀, 면화, 담배, 헤이절넛, 과일등입니다. 주요 가축은 양이며, 터키는 세계유수의 면화와 양모 제품 산지입니다.
동남아나톨리아·프로젝트(GAP)
GAP는 다목적 종합개발 프로젝트로 댐, 수력발전소, 관개시설로 프라트(유프라테스)강과 디즐레(티그리스)강에 건설중입니다. 이 프로젝트는 농업, 교육, 관광뿐만아니라 위생상태의 개선등에도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프로젝트의 일환인 아타투르크댐은 세계최대급 규모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천연자원 : 주요광물은 석탄, 크롬(주요 수출품), 철, 동, 보크사이드, 대리석, 유황입니다.
산 업 : 산업은 급속하게 발전하여 농업제품, 치금, 섬유, 자동차나 농장기기의 생산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습니다.
정치기구
터키공화국은 정권분리, 민주, 다원의회제에 의거하여 법과 사회정의하에 인권이 옹호되고 있습니다. 국회의원은 국민의 투표로 선출되고 총리대신을 장으로 하는 각료가 나라를 다스리고 있습니다. 터키는 OECD,흑해경제협력기구의 창설 회원국이며, NATO유럽회의, 유럽의회의회원국, EU의 준회원국이기도 합니다.
Posted by 다울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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