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몽고 초원에 거주했던 유목민은 옛부터 늘 중국의 안보를 심각하게 위협했다. 이들에 관한 기록은 대체로 중국측이 남겨 놓았고 유목민 스스로 남긴 기록은 매우 적다.


  B. C. 221년 중국이 춘추전국시대의 분열을 끝내고 진秦에 의해 통일되었을 무렵, 흉노족이 유목국가를 건설했다. 시황제가 장군 몽염을 보내어 격퇴시켰으나 곧 세력을 회복하였고, 진을 이은 한나라는 무력의 열세를 어찌할 수 없어 조공으로 평화를 유지했다. 한 무제(武帝, 재위 B. C. 140~87)의 10년에 걸친 대규모 원정으로도 이들을 뿌리뽑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내분으로 2차에 걸쳐 흉노가 분열하여 중국은 한동안 우월한 입장을 누렸다. A. D. 3세기에 들어와 크게 다섯 계통의 유목민 집단이 중국으로 이주, 이른바 5호 16국 시대가 열렸다. 이중 선비족이 세운 북위北魏가 강북을 통일하였고(439) 강남 지역은 한족漢族이 세운 여러 왕조가 명맥을 이었다. 이러한 남북 분열 상황으로 후세에 이때를 남북조 시대라 부른다.


  중국의 남복조 시대에는 몽고 계통의 유목국가인 유연(柔然, 또는 茹茹로도 표기)이 북조를 위협하였다. 6세기 중반 유연에 신속臣屬한 유목부족의 하나였던 투르크 계통의 돌궐突厥이 흥기, 유연을 격파하고(552) 초원의 패자가 되었다.


  한자 표기인 돌궐의 정식 명칭은 돌궐 비문에 따르면 '쾩-튀르크(Kok Turk)' 로 하늘(Kok) 에 속한 신성한 투르크란 의미를 가진다. 이로부터 투르크가 정식 종족명으로, 또한 국명으로 사용되었으며 오늘날까지 지구상의 다양한 투르크 계 종족이 연대 의식을 가지고 있다.


  돌궐 제국의 창건자는 부민(Bumin, 土門)으로 그가 돌궐 부족 연맹의 지도자로 부상하고 집권하기까지의 과정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가 중국 사서에 등장하는 시기는 535년이다. 545년 중국의 서위西魏와 동맹 관계를 맺은 그는 유연에 대해 유연의 공주와의 혼인을 요구했다. 이는 유연에 대한 노골적인 도전의사였다.

 

유연이 거절하자 부민은 서위의 공주를 맞아들이고 552년초 서위와 연합하여 유연을 멸망시켰다. 이때 부민은 일 카간(Il- Qagan, 伊利可汗) 이란 호칭을 쓰면서 초원의 지배자임을 공언하였다. 그러나 그 해에 사망하였다.


  일 카간의 사후 관습대로 형제와 자식들에게 제국이 분배되었다. 돌궐 제국의 서부 지역은 일 카간과 함께 정복전에 참가해 공이 큰 동생 이스테미(Istemi, 室點密)가 계속 통치하였다. 동부 지역의 통치권은 일 카간의 아들 콜로(Kolo, 科羅)가 승계했다가 일찍 죽어 아우인 무한(Mukhan, 木杆,)이 553년 새로운 카간으로 즉위했다.


  돌궐 서부 지역의 이스테미는 카간 대신 야브구(Yabgu, 葉護 ; 제 2왕) 칭호를 사용하여 동부 지역에 대한 하위 개념을 분명히 했다. 이스테미 야브구는 서쪽으로 영토를 계속 확장했으며 동로마와 페르시아의 사산 왕조와 교류하였다. 에프탈리테 부족이 실크 로드의 중개 무역을 장악하자 이스테미 야브구는 사산 왕조와 합동하여 에프탈리테를 멸하였다(557). 이 지역은 아무 강(지금의 Oxus 강)을 경계로 분할되었다.<#TAG>   돌궐 비문의 하나인 퀼 테긴 카간의 비문에는 돌궐의 초창기 정복 활동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위로 푸른 하늘과 아래로 적갈색 땅이 창조되었을 때, 그 둘 사이에 사람이 창조되었다. 사람들 위에는 나의 조상 부민 카간과 이스테미 카간이 보위에 앉았다. 보위에 앉아서 돌궐족의 국법을 잡아 주었고, 세워주었다.

 

사방은 모두 적이었다. 오만한 자들을 머리 숙이게 하고 힘있는 자들을 무릅을 꿇게 하였다. 동쪽으로는 카디르칸(흥안령 산맥) 까지 서쪽으로는 철 문(鐵門 ; 트란스옥사니아) 까지 (부족민들을) 자리잡게 하였다. 두 (경계) 사이에서 아무런 조직도 없이 (살았던) 쾩 투르크(Kok Turk) 인들을 수습하여 그렇게 다스렸다.


  [그분들은] 현명한 군주들이었다. 용감한 군주들이었다. 지휘관들도 정녕 현명하였다. 정녕 용감하였다. 지배층도 부족민들과 분명 평화와 조화 속에 있었다. 그리하였기 때문에 나라를 그렇게 잘 다스리었다. 나라를 다스리고 법을 세웠다.

  동부 지역의 무한 카간은 555년 유연의 잔존 세력을 소탕하고 그 부근의 여러 유목 부족을 병합하였다. 더 나아가 동쪽의 거란을 복속시키고 고구려를 침공하였다.『삼국사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가을 9월, 돌궐이 신성新城을 포위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자, 군대를 이동하여 백암성을 공격하였다. 왕이 장군 고흘高紇에게 군사 1만을 주어 그들을 물리치고, 1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신라가 침공하여 열 개의 성을 빼앗았다.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陽原王 7年)

  『삼국사기』에 나오는 삼국의 대외관계는 대부분 중국 사서를 인용한 것이다. 그러므로 삼국과 중국의 관계는 모두 조공관계로 묘사되었다. 이에 비해 돌궐과의 충돌을 전하는 이 기록은 중국 사서에 나오지 않는 고유 기록이다. 이 해는 551년에 해당하며 고구려가 신라·백제 연합군에 의해 한강 유역을 상실한 해이다.

 

그러나 돌궐의 성장과정을 추적해 보면 551년에 고구려를 공격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삼국사기』의 기록은 551년 이후에 있었던 사실을 전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TAG>   고구려와 돌궐의 전쟁은 중국의 기록에 단편적으로 나온다. 그에 따르면 고구려는 말갈 부족과 더불어 돌궐을 격파했다.

 

돌궐의 고구려 침공은 처음에는 돌궐이 유연의 잔여 세력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듯 하다. 6세기 말~7세기 초 활동하였던 동로마 역사가 시모카테스Simokattes는 유연의 잔여 세력이 중국(북제)으로 도주했고 그곳에서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가 쫓기어 동쪽의 Moukri(고구려)로 갔다고 기록했다.

 

그는 Moukri는 "중국에 인접해 있다. Moukri인들은 위험에 대처하는 강인한 정신력과 매일매일의 신체단련으로 그들의 투지는 매우 높았다" 고 하였다. 동로마 제국은 돌궐과 비단을 매개로 교류하였던 관계로 돌궐을 통해 고구려에 대한 지식이 전해졌고, 이로 인해 동로마 문헌에 이러한 기록이 남았다 (568년 돌궐의 사신이 비잔티움에 도착한 것이 최초의 접촉이었다).


  '고구려인들은 … 매일매일의 신체단련으로 그들의 투지는 매우 높았다' 라는 동로마의 기록은 중국의 역사서인『구당서舊唐書』에 나오는 기록과 일치한다.

  각 거리마다 큰 집을 지어 경당 堂이라 부른다. 자제子弟들이 결혼할 때까지 밤낮으로 이곳에서 독서와 활쏘기를 익히게 한다. (『구당서舊唐書』「동이 열전」고구려)

  고구려로 이주한 유연으로 말미암아 돌궐과 고구려 사이에 전단(戰端)이 일어났을 가능성은 충분히 상정해 볼 수 있다. 또한 고구려와 돌궐은 두 나라 사이에 있는 거란족과 말갈족을 복속시키려는 과정에서 충돌하여 오랬동안 적대국으로 지냈다. 중국 역사서에서 단편적으로 이러한 모습이 보인다.

  … 왕년에 이계찰(利稽察)이 고구려·말갈에 크게 격파되고 … (隋書, 突厥傳)

  이 기록은 돌궐이 고보녕(高保寧 ; 북제 말기에 영주자사가 되었고, 북제가 멸망하자 북주와 그 뒤를 이은 수에 투항하기를 거부하고 독립세력으로 있었음)과 연합하여 581~582년에 수를 침입, 수군을 격파하자 이에 격분한 수 문제 양견이 582년에 내린 조서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계찰(利稽察)에서의 '察'은 돌궐의 관직명 '샤드(Shad)'를 뜻하며 設, 殺, 煞로도 표기된다. 돌궐 제일 제국에는 28관등이 있었는데 Shad는 야브구(Yabgu, 葉護 ; 제 2왕)다음의 제 2관등이다. 이 자리는 돌궐 왕족에게만 주어지는 것으로 그 직능은 '別部領兵者' 로 부족을 거느리면서 부족민을 지배하였다.

 

 고구려가 돌궐의 이계찰을 격파한 것은 돌궐의 동진을 성공적으로 막았음을 보여주는 일이다. <#TAG>   북위는 534년 동서로 분열되고 동위東魏와 서위西魏는 각각 북제(北齊, 550년 건국)와 북주(北周, 557년 건국)로 이어졌다. 이러한 중국 북조의 내분기에 건국한 돌궐은 유연과 달리 북조에 우월한 지위를 누렸다(북위에 눌렸던 유연도 북위가 동서로 분열하자 잠시동안이나마 우위를 누렸다).


  돌궐은 건국 무렵부터 서위와 동맹관계였고 서위를 계승한 북주와도 동맹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돌궐은 늘 창구를 열어 놓았고 돌궐을 중립화 내지 자기편으로 만드려는 북제의 헌상을 받았다. 이에 따라 북주도 부지런히 헌상을 하였고 북주의 태조는 무한 카간의 딸을 황후로 맞이하는 굴욕을 자청하였다(565).

 

당시의 외교 관례상 외국 공주를 후궁이 아닌 황후(皇后)로 영입하는 것은 하위 신분임을 공식 천명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연이 강성할 때 처음에는 서위가, 나중에는 동위가 유연의 공주를 각각 황후로 맞아들인 것은 유연의 세력을 이용하여 상대를 제압하려는 궁여지책이었다. 북주와 북제는 서로 돌궐 공주를 맞아들이려 다투다가 북주가 승리를 거두었다. 분열로 열세에 놓인 중원 국가들이 스스로 굴욕을 자청한 셈이다.

  돌궐 제국의 위세를 떨친 무한 카간은 572년 사망했다. 그의 공적과 당시 국제사회에서의 위상은 돌궐 비문에 잘 나타나 있다.

  사방에 군대를 보내어 모든 종족을 복속시키고, 머리를 가진 자는 머리를 숙이게 하고, 무릅을 가진 자는 무릅을 꿇게 하셨도다. 앞(동)으로는 킨칸 산맥에, 뒤(서)로는 철문(鐵門) 에 이르기까지 돌궐 민족이 지배하는 돌궐 국가가 되었다. 그는 현명한 군주였다. 용감한 군주였다. 신하들과 귀족, 백성들도 모두 현명하고 용감하였다. ― 외투켄에서 거행된 그의 장례식에는 사방의 국가와 종족이 모두 슬퍼하며 조문 사절을 보냈다. 중국, 티벳, 비잔틴, 아바르(유연), 거란 그리고 고구려 등등 ―

  무한 카간을 이어 그의 동생인 타파르(Tapar, 陀鉢, 재위 572~581)가 카간이 되었다. 그의 즉위후에도 한동안 돌궐의 중국의 북조에 대한 우위는 유지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주서周書』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당시 제나라와 교전할 때라 해마다 군대를 동원하였기 때문에 매번 돌궐과 연결하여 외원으로 삼았다. …… 이래 그 나라는 부강하여 중국을 능멸하려는 뜻이 있었다. 조정은 화친을 맺고도 해마다 십만필을 주었으며 수도에 있는 돌궐인을 모두 후히 대접하니 비단옷을 입고 고기를 먹으며 (호화스럽게) 사는 자가 수천명이었다.

 

 제나라는 그들의 침략이 두려워 역시 나라 살림을 기울여 증물贈物을 보냈다. 타파르(陀鉢)는 더욱 교만해져 그 부하들을 거느리며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즉 "우리에게 남쪽의 효순孝順한 두 아이 놈(북주와 북제)만 있다면 무었 때문에 재물이 없을 것을 걱정하겠는가?"<#TAG>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577년 북주가 북제를 합병하여 북중국이 통일되었다. 돌궐은 즉각 북제 부흥을 내걸고 북주를 공격하였다.

 

아직도 돌궐의 군사적 우위는 여전했으나 곧 이어 유목 국가에서 일어나기 쉬운 국가 분열이 일어났다. 일 카간의 동생으로 돌궐 서부를 다스리던 이스테미 야브구는 576년 사망하였다. 그의 뒤를 이은 아들 타르두(Tardu, 達頭, 재위 576~603)는 동부 돌궐의 종주권을 인정한 아버지와 달리 완전 독립을 추구했다. 우선 야브구 위에 오른 직후 타파르 카간의 통제를 단호히 거부하고 스스로 카간으로 행동했다.


  581년은 중국과 돌궐에 큰 전환점이 된다. 이 해에 동돌궐에서는 타파르 카간이 사망하고 계승분쟁이 일어났으며, 북주에서는 외척 양견이 제위를 찬탈하여 수를 건국하였다. 카간 자리를 놓고 타파르 카간의 아들 안로(Anro, 菴羅)와 조카인 탈로핀(Talopien, 大邏便)이 경쟁하였다.

 

 탈로핀은 처음에 타파르 카간에 의해 카간으로 추천되었으나 돌궐의 귀족 회의 (Toy)는 그의 모친이 돌궐계가 아니라는 이유로 카간 자격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안로가 즉위했으나 이번에는 탈로핀 측이 강력히 반발, 결국 타협하여 콜로 카간의 아들인 이쉬바라(Ishbara, 始波羅, 재위 581~587)에게 양위하였다.


  이쉬바라는 안로에게 제 2 카간 칭호를, 다로빈에게는 아파 카간(Apa Qagan) 이란 칭호를 주어 단결을 도모했다. 그러나 다로빈은 서부 돌궐의 타르두에게 가서 자신의 입지를 확보하려 했다. 이쉬바라의 하툰(可敦 ; 황후)은 북주의 천금(千金) 공주였는데 가문의 복수를 주장하는 그녀의 영향력으로 돌궐은 수와 교전하게 되었다.


  돌궐과의 전쟁은 수의 창업주 수 문제 양견(재위 581~604)에게 큰 위협이었으므로 돌궐 의 분열시키려 즉시 돌궐 서부의 타르두에게 접근하여 돌궐 카간으로 인정하였다. 이쉬바라카간은 중국과 돌궐 서부를 적으로 상대하는 부담을 안게 되었다. 이쉬바라는 우선 자신의 통치 영역에 있는 다로빈의 근거지를 초토화시키고 추종 세력을 소탕하였다.

 

 결국 582년 타르두가 동부 돌궐의 카간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선언하여 돌궐은 공식적으로 동서로 양분되었다. 돌궐은 분열되고 북중국은 통일되니 돌궐, 특히 동돌궐의 열세는 분명해졌다.


[출처]http://kin.naver.com/knowhow/entry.php?d1id=10&dir_id=10&eid=3IOJAl7G83fSknYfYtfG1G11RAseBkRo&qb=sO2xuLfBv80gtbmxyA==&enc=euc-kr&pid=fQj%2Fhloi5TGssZQd72Zsss--452232&sid=Sfa-YsGb9kkAAECaoxA
Posted by 다울의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