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아침, 은행에 잠시 다녀와서 현관문을 여는데 아들 녀석이 황급히 뛰어 나와 노무현 대통령이 돌아가셨단다.
뭔말인지 몰라 대충 듣고 방에 들어갔더니, 텔레비전에서 서거 소식이 나오고 있었다. 서거일 오전 10시 경....
잠시 멍했다.
현실감이 안느껴졌다.
그럴 리가 없는 분인데.... 내가 유일하게 존경하는 정치인이자 대통령인데... 비뚤어져 가는 이 나라 현대사의 줄기를 바로 잡고자, 그리고 진짜 상식이 통하고, 이 나라 국민이면 누구나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자 헌신한 분인데, 그렇게 허무하게 삶을 마감하실 리가 없다는 생각에 현실감이 전혀 없었다.
그 순간 비통함도, 착잡함도, 슬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방송 채널에서 앵커들과 기자들이 당신의 서거가 사실이라고 거듭 주장하고, 더불어 당신의 서거는 실족사가 아닌 유서가 발견된 자살이라고 얘기하는 것을 들으며 사실로 인정하기로 했다. 정말... 그냥... 인식적인 인정이다. 내 감정을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무엇때문에...?
당신의 승부사 기질이 발휘된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의 음모인가? 그런 생각도 해 본다. 요즘 주로 읽은 것이 소설들인지라, 복선처럼 깔린 음모도 생각해 봤다. 지금에 와서는 현 정치권력이 걸림돌로 여긴 당신의 명예를 짓밟으며 죽인 것으로 보면 음모론도 말이 되지 않을까...?

혼돈스럽고 혼랍스럽다.

그리고 더욱 큰 애통은 이제 더 이상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것이다.
당신의 구수한 어투 속에 묻어 있는 논리와 진실은 내 삶의 작은 기쁨이었는데, 이젠 들을 수 없다는 것이 정말 속상하다.
작금이 이 답답한 MB정권의 정책과 공권력 행사에 대한 당신의 일침을 듣고 싶었는데, 이젠 들을 수 없다는 것이 절망스럽다.

오늘 프레시안의 기사에서 당신의 죽음이 명예를 택한 것이라는 글을 읽었다.
현 정권과 집권수구세력이 당신을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예우를 하지 않음에 당신 스스로 명예를 선택한 것인가 라는 생각을 해 본다.

당신을 무너뜨리는... 당신을 마치 전두환, 노태우와 비교하며 떠드는 언론에, 한나라당 앞에 가장 명예스러운 대통령이었음에도 그렇지 못한 인식으로 대중을 현혹시키는 그들 앞에 당신은 소리없이 당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최후의, 절대 사용하지 않았으면 한 선택과 결정을 한 것인가?
"전직 대통령 중 3번째 검찰 출두...."
하지만 동네 똥개도 그 출두의 의미는 다 안다.
역사와 국민 앞에 지은 죄로 대검찰청에 들어가는 두 명의 전직 대통령과, 당신의 행보가 어찌 비교될 수 있는 것인가?
삼척동자도 다 아는 그 사실을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찌라시 신문과 언론, 한나라당은 같은 무게로 치부하며 열심히 호도해 댄다.
이건 쇄뇌다. 지난 10년간 많이 현명해진 국민을 다시금 우민화시키는 쇄뇌!!!!
이 현실 앞에 당신과 당신을 존경하는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었는가?
그 모든 무게감의 중심에 있는 당신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 누구도 당신의 짐을 같이 짊어질 수 없기에 당신은 책도 읽을 수 없고, 글도 쓸 수 없는 처지에 놓였던 것이 아닌가?
나 같은 평범한 인간의 고민은 내가 한 실수로 인한 책임을 지는 것이 전부라.... 역사적 짐을 짊어지는 것이 어떠한 무게감인지 피부로 와닿지는 않지만, 조금은 느낄 수 있다. 누구와도 나눠지지 못하는, 나만이 책임져야 하는 문제에 대한 고독감...

다시금 우울해진다. 어디에도 이런 정치인, 대통령은 없었기에...
앞으로 얼마의 시간이 흘러야 시대와 권력에 영합하지 않는... 그리고 대본대로만 읽어야 하는 문장력없는 대통령이 아닌, 국민과 자신의 행동하는 철학을 가지고 소통할 수 있는 정치인이 나올 수 있을까?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지금 현재의 현실적 기반과 힘이 없는 것이 아쉽지만, 노통과 가장 잘 통했고, 열우당에 내가 관심을 가지고 지지하게 만들었던 또 한 명의 정치인인지라 기대를 해 본다.
노통의 가치와 철학을 이어 받아, 신문을 보고 뉴스를 보며, 나도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써 자존감과 소속감이 들 수 있도록 하는 그 때를 유시민 장관이 해 줬으면 하는 바램도 가져본다. 그래서 오늘 예스24에서 노무현, 유시민으로 검색되는 책 중에 관심가는 책 6권을 주문했다.

마지막으로 재수시절 나를 울렸던 "죽은 시인의 사회" 마지막 장면을 회상해 본다.
존 키팅...Carpe Diem... 그 속의 앤더슨, 닐...
수구 보수 아버지 밑에서 키팅을 만나 비로소 자기의 선택을 하게 된 닐... 만들어진 틀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닌, 내 시선으로, 내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되면서 자기의 선택을 하게 되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아버지와 갈등하며, 힘 없는 자식된 입장에서 결국 아버지의 권총으로 자살하는 닐...
그리고 앤더슨... 수줍은 소년으로 부끄럼을 많이 타고, 나서지 못하고, 자신을 생각을 주장하지 못하는 내성적인 학생이 키팅을 만나 부끄럼을 극복하고 자기 속에 있는 자아의 자신감을 찾아내고, 삶의 주체적 재미를 만들어 간다.
기존의 전통과 틀로 IVY리그 진학율을 높이는 것이 목표인 미국 명문 고등학교 안에서 이런 키팅의 교육철학은 외면과 왕따를 당했지만, 그를 따르는 학생들을 그를 캡틴, 선장이라 부르며 존경하고 좋아한다.
하지만 학교권력 앞에 키팅을 해고를 당하고 떠나간다. 노통 당신의 미소처럼 키팅은 자신의 짐을 들고 나오며 학생들에게 눈인사를 한다.
그 때 가장 수줍은 소년 앤더슨이 책상 위로 올라간다. 그리고 소리친다. " Oh! Captain, My Captain."
교장의 눈치를 보던 학생들이 하나 둘씩 동참한다. 공부벌레 카메룬만 빼고...
마지막 장면에 키팅은 학생들을 보며 키팅's Smile을 보여주며 영화가 끝난다.

노통은 키팅과 같은 존재다.
잠들어 있는 우리의 의식을 깨웠고, 하나의 자연인으로써, 종속된 개체가 아니라 독립된 주체로써 대한민국 헌법이 보장하는 권리와 의무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을 줬다. 무엇보다 소통의 의미를 일깨워 줬다.
대학시절 어느 교양과목의 교수님은 한 학기 내내 민주주의는 "소통하는 사회"라고 강조하셨다.

노무현 前 대통령님... 당신의 나의 영원한 대통령이십니다.
편히 잠 드세요.
당신이 지난 시간 일궈놓은 역사의 물줄기는 힘없이 사그라들지 않을 것입니다.
민초가 깨어나고, 생각할 수 있는 힘이 생기고, 무엇이 진실인지 판단할 수 있는 분별력이 생기고 있기에, 당신이 추구했던 가치는 더 이상 수면 아래로 다시금 가라앉지 않을 것이고, 우리의 일상이 되어 더 이상 민주주의를 노래하지 않아도 되는 당연한 그 때가 올 것입니다.
편히 잠드십시오.
사랑합니다.

Posted by 다울의 꿈

오늘 어버이날이다.
어제 부모님을 찾아뵙고, 오늘은 우리 태우와 예원이에게 어버이 대접(?)을 받았다.

예원이가 어제 학교에서 열심히 만들어 온 카드며 편지로 구성된 어버이 은혜 패키지 안에 아빠와 엄마에게 수여하는 상장이 들어 있다.

엄마는 청소상... 우리 집에서 청소를 제일 잘 한다고 준단다. 맞는 말이긴 한데, 그거보다 더 고상하고 좋은 상 제목이 있을텐데... 그걸로 각인되었다니 아쉽다.

내가 받은 아빠상은 고치기상이다. 우리 집에서 무엇이든 잘 고치기에 상을 준단다.

집에서 컴퓨터 고칠 사람이 나 밖에 없으니 문제 생기면 열일 제쳐두고 고쳐서 아이들이 컴터 사용하는데 문제없게 해 주어야 하고, 못질, 망치질 등등 하드한 일도 할 사람이 나밖에 없으니, 예원이가 준 상은 타당한다. 근데, 약간의 씁쓸함이 존재하는 것은 왜일까?

좀 더 고상한 상이 주어졌으면 어떨까?

난 우리 아이들에게 책도 잘 읽어주고(책 읽어주는 아빠상), 잠 잘때 이야기 들려주는 것도 잘하고(이야기 잘 들려주는 아빠상), 매일매일 잠자기 전 머리맡에서 기도도 해 주고(기도상) 하니까 생각하면 참 많은데 그 중에 컴퓨터를 비롯한 여러가지를 잘 고쳐주는게 가장 각인이 된 것일까?

위 사진을 보면 오늘의 나와 다른 예전의 나를 만나게 된다.
2008년 어느 날인가 기획팀원들과 코엑스에 이러닝 박람회를 갔다가 코엑스 주차장 앞에서 찍은 사진이다.
현재의 나는 서점과 복사실을 운영하는 사람이다. 사장이다. 실장으로 불리는....

그 때의 나는 한 회사의 본부장이다. PM팀, 설계팀, 개발팀의 3팀 23명의 본부원을 거느린...

지금의 나는 양복을 입을 수 없다. 편한 캐주얼로 복사, 제본, 문구, 도서판매 등의 먼지나는 일을 한다. 그래서 맨날 청바지에 면티를 입는다.

그 때의 나는 양복만 입어야 한다. 와이셔츠에 넥타이, 그리고 최대한 젠틀에 보이는 양복에 구두...
잦은 회의와 미팅 등으로 회사의 품위를 보여줘야 하기에...
그리고 그 때는 컴퓨터 앞에서 보고를 받거나, 자료를 만들고, 회의실에서 미팅하고, 외부에 나가서 프리젠테이션 하고 등등의 화이트컬러로써 살아왔다.

태우와 예원이랑 얘기를 하다보면, 지금의 서점, 복사실 실장님보다 그 때의 본부장을 더 멋있어 한다.
지금 아빠가 더 행복하고 돈도 더 많이 벌어... 라고 아이들을 위안해도 아이들 스스로의 느낌과 생각을 바꾸지는 않는다.
몇 번 그 때의 회사에 와보고, 내 자리에 앉아보고, 내 직원들의 인사를 받아보면서 아빠의 모습에 뿌듯함과 자랑스러움이 있었나보다. 외형상으로 지금의 서점, 복사실은 그 때의 인상만큼 강렬하진 않은가 보다.



나는 나의 변화에 성공하고 있는 중이다.
태우와 예원이가 기대하는 아빠의 명예를 찾다보면 그 때의 내모습에서 보았던 명예스러운 아빠를 이 곳에서도 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런데 무엇보다, 내가 하는 내일을 내 스스로 명예롭게 생각하고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내 속의 내적 에너지를 충만하게 함으로....
Posted by 다울의 꿈
2008년 가을...
지금의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면서, 아들과의 목표를 하나 정했다.
태우가 4학년 되는 때부터 아빠랑 공유할 수 있는 여행경험 쌓기...

첫 번째이기에 쉽게 시도할 수 없는, 많은 준비가 필요한 것으로 정하기로 했다.
그 당시 태우는 초등 2학년이었고, 2년이란 시간이 남아있어서 스케일을 키워보고 싶었다.

그때 내 심장은 나에게 터키에 가보라고 권했다.
그리고 나는 서슴없이 터키를 나와 태우의 Hard Travel Course로 낙점하고, 거꾸로 터키에 가야 하는 이유를 찾기 시작했다.

나름 괜찮은 방법이라 생각한다.
이런저런 이유로 저기를 하고 싶다가 가장 많이 선호되는 것이지만, 저길 가고 싶어서 이런 저런 정보를 찾다보니 정말 더 가고 싶게 되었다고 괜찮은 결론 도출방법이라 생각한다.
자료와 정보를 찾는 중에 내 맘에 내키는 정보가 낚이지 않으면 다른 행선지를 알아보면 되니까...

여하튼 터키는 왜 그런지 모르게 내 마음이 끌렸다.
그래서 지금 터키를 공부하며 가야 하는 이유와 목적을 정의하고 있다. Mission Statement!!!!

우선 터키에 대한 정보를 찾으면서 드는 첫 번째 이끌림은 "미안함"이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터키의 한국에 대한 One Side Love의 미안함이다.
주워들은 정보에 의하면 터키인들은 우리나라를 "형제의 나라"라고 생각하고, 다른 여타국민에 비해 무지 친절하게 대한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터키에 대한 애정이 그리 없다. 역사에서 너무 멀어있고 무관하기에 친밀감 "0"의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래 저래 자료를 보다 보니 그네들과의 역사는 1천 년을 훌쩍 뛰어넘어 고구려 시대, 연개소문 시대 즈음 열애를 하고 있었다 하고, 터키인들은 그 당시 우리 고구려와의 관계를 역사시간에 배우며 우리나라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을 유지하고 있다하니... 부끄럽다. 나 또한 터키가 돌궐이었으며, 우리와 함께 수나라에 대항하여 싸운 동맹국이었으며, 연개소문이 돌궐의 공주와 결혼하여 피를 나누었다고 하는 역사적 사실을 근자에 들어서야 알게되었으니 부끄러울 따름이다. 그 미안함을 씻고파서 터키를 가야 한다. 가서 나도 아니, 우리나라도 너희들을 형제라고 생각한다며 그들과 진지한 대화와 허깅을 하고 돌아오고 싶다.

터키를 가야하는 두 번째 이유는 "파묵칼레"이다.
한 20년 전 우리 목사님께서 첫 번째 성지순례를 다녀오시고, 찍어온 사진 속의 장면을 잊지 못하고 있다.
그 때는 석회암으로 둘러싸인 노천온천인데, 참 특이하고 저기로 휴가, 여행을 다녀오면 참 좋겠다는 좋은 인상 정도였는데, 터키 정보를 찾다보니 거기가 터키 내륙에 있는 파묵칼레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또 어느 터키여행 책에 소개된 그 지역 사람들과 호텔 이야기를 읽으며 정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파무칼레를 가게되면 난 거기서 태우와 반나절 정도를 온천하며, 책 한 권정도 읽으며 시간을 소요하고 싶다.

그 다음 터키가 끌리는 이유는 "지중해"이다.
왠지 낭만적이고, 왠지 모를 아름다움이 존재할 것 같은 지중해를 보고 싶다. 수많은 역사적 발자취가 살아있는 실크로드와 이스탄불, 그리고 아름다운 지중해... 거길 가고 싶다.

마지막으로 떠 오르는 생각은 "바울의 발자취와 초기 기독교의 성지"를 보고 싶다.
이게 첫 항목일지 마지막 항목일지 잠시 고민되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마지막 항목으로 두고 싶다.
차후 진짜 성지순례를 가게될 때는 첫 항목이 되겠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성지순례는 옵션이기 때문이다.
에베소나 많은 기독교 유적은 나와 태우의 발품을 파는 범위 내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터키 여행의 목적을 다시 정리하자면...
1. 형제의 나라 터키에 대해 좀 더 친밀해 지기(그들의 정치,경제,역사 등) : 형제에 대해 많이 알기
2. 터키만이 가지고 있는 자연환경 및 문화유적 즐기기(지중해, 파묵칼레, 블루모스크, 그랜드 바자르, 카펫 등)
3. 초대교회 및 바울의 흔적 만나기


이렇게 거창하게 선언하고 보니, 한 달 정도를 여행을 하고 와야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고 있는 일정은 9일 ~ 10일 정도...
여행사를 통하지 않고, 발품 팔아 돌아다닐 생각이니 아주 치밀하지 않으면 많은 시간이 허비될 것이고, 현지에서 발생할 돌발상황들을 생각하면 변수가 많으리라 생각한다.
많은 비용을 들여 여행을 갔기에 최대한 본전을 뽑기 위해 많은 좋은 것을 경험해 봐야하겠지만, 위의 3가지 목적은 여행을 좀 더 가치있게 하기 위한 Objects일 뿐이고, 최상위의 Goal은 태우와 아빠의 공통경험 만들기와 소통에 있다. 의식이 커 가는 아들과 지속가능한 소통을 만들어 내는 것이 터키 여행에 기대하는 아빠의 작지만, 소박하지만, 쉽게 손에 넣을 수 없는 원대한 꿈이자 목표이다.
Posted by 다울의 꿈

현재의 몽고 초원에 거주했던 유목민은 옛부터 늘 중국의 안보를 심각하게 위협했다. 이들에 관한 기록은 대체로 중국측이 남겨 놓았고 유목민 스스로 남긴 기록은 매우 적다.


  B. C. 221년 중국이 춘추전국시대의 분열을 끝내고 진秦에 의해 통일되었을 무렵, 흉노족이 유목국가를 건설했다. 시황제가 장군 몽염을 보내어 격퇴시켰으나 곧 세력을 회복하였고, 진을 이은 한나라는 무력의 열세를 어찌할 수 없어 조공으로 평화를 유지했다. 한 무제(武帝, 재위 B. C. 140~87)의 10년에 걸친 대규모 원정으로도 이들을 뿌리뽑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내분으로 2차에 걸쳐 흉노가 분열하여 중국은 한동안 우월한 입장을 누렸다. A. D. 3세기에 들어와 크게 다섯 계통의 유목민 집단이 중국으로 이주, 이른바 5호 16국 시대가 열렸다. 이중 선비족이 세운 북위北魏가 강북을 통일하였고(439) 강남 지역은 한족漢族이 세운 여러 왕조가 명맥을 이었다. 이러한 남북 분열 상황으로 후세에 이때를 남북조 시대라 부른다.


  중국의 남복조 시대에는 몽고 계통의 유목국가인 유연(柔然, 또는 茹茹로도 표기)이 북조를 위협하였다. 6세기 중반 유연에 신속臣屬한 유목부족의 하나였던 투르크 계통의 돌궐突厥이 흥기, 유연을 격파하고(552) 초원의 패자가 되었다.


  한자 표기인 돌궐의 정식 명칭은 돌궐 비문에 따르면 '쾩-튀르크(Kok Turk)' 로 하늘(Kok) 에 속한 신성한 투르크란 의미를 가진다. 이로부터 투르크가 정식 종족명으로, 또한 국명으로 사용되었으며 오늘날까지 지구상의 다양한 투르크 계 종족이 연대 의식을 가지고 있다.


  돌궐 제국의 창건자는 부민(Bumin, 土門)으로 그가 돌궐 부족 연맹의 지도자로 부상하고 집권하기까지의 과정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가 중국 사서에 등장하는 시기는 535년이다. 545년 중국의 서위西魏와 동맹 관계를 맺은 그는 유연에 대해 유연의 공주와의 혼인을 요구했다. 이는 유연에 대한 노골적인 도전의사였다.

 

유연이 거절하자 부민은 서위의 공주를 맞아들이고 552년초 서위와 연합하여 유연을 멸망시켰다. 이때 부민은 일 카간(Il- Qagan, 伊利可汗) 이란 호칭을 쓰면서 초원의 지배자임을 공언하였다. 그러나 그 해에 사망하였다.


  일 카간의 사후 관습대로 형제와 자식들에게 제국이 분배되었다. 돌궐 제국의 서부 지역은 일 카간과 함께 정복전에 참가해 공이 큰 동생 이스테미(Istemi, 室點密)가 계속 통치하였다. 동부 지역의 통치권은 일 카간의 아들 콜로(Kolo, 科羅)가 승계했다가 일찍 죽어 아우인 무한(Mukhan, 木杆,)이 553년 새로운 카간으로 즉위했다.


  돌궐 서부 지역의 이스테미는 카간 대신 야브구(Yabgu, 葉護 ; 제 2왕) 칭호를 사용하여 동부 지역에 대한 하위 개념을 분명히 했다. 이스테미 야브구는 서쪽으로 영토를 계속 확장했으며 동로마와 페르시아의 사산 왕조와 교류하였다. 에프탈리테 부족이 실크 로드의 중개 무역을 장악하자 이스테미 야브구는 사산 왕조와 합동하여 에프탈리테를 멸하였다(557). 이 지역은 아무 강(지금의 Oxus 강)을 경계로 분할되었다.<#TAG>   돌궐 비문의 하나인 퀼 테긴 카간의 비문에는 돌궐의 초창기 정복 활동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위로 푸른 하늘과 아래로 적갈색 땅이 창조되었을 때, 그 둘 사이에 사람이 창조되었다. 사람들 위에는 나의 조상 부민 카간과 이스테미 카간이 보위에 앉았다. 보위에 앉아서 돌궐족의 국법을 잡아 주었고, 세워주었다.

 

사방은 모두 적이었다. 오만한 자들을 머리 숙이게 하고 힘있는 자들을 무릅을 꿇게 하였다. 동쪽으로는 카디르칸(흥안령 산맥) 까지 서쪽으로는 철 문(鐵門 ; 트란스옥사니아) 까지 (부족민들을) 자리잡게 하였다. 두 (경계) 사이에서 아무런 조직도 없이 (살았던) 쾩 투르크(Kok Turk) 인들을 수습하여 그렇게 다스렸다.


  [그분들은] 현명한 군주들이었다. 용감한 군주들이었다. 지휘관들도 정녕 현명하였다. 정녕 용감하였다. 지배층도 부족민들과 분명 평화와 조화 속에 있었다. 그리하였기 때문에 나라를 그렇게 잘 다스리었다. 나라를 다스리고 법을 세웠다.

  동부 지역의 무한 카간은 555년 유연의 잔존 세력을 소탕하고 그 부근의 여러 유목 부족을 병합하였다. 더 나아가 동쪽의 거란을 복속시키고 고구려를 침공하였다.『삼국사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가을 9월, 돌궐이 신성新城을 포위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자, 군대를 이동하여 백암성을 공격하였다. 왕이 장군 고흘高紇에게 군사 1만을 주어 그들을 물리치고, 1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신라가 침공하여 열 개의 성을 빼앗았다.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陽原王 7年)

  『삼국사기』에 나오는 삼국의 대외관계는 대부분 중국 사서를 인용한 것이다. 그러므로 삼국과 중국의 관계는 모두 조공관계로 묘사되었다. 이에 비해 돌궐과의 충돌을 전하는 이 기록은 중국 사서에 나오지 않는 고유 기록이다. 이 해는 551년에 해당하며 고구려가 신라·백제 연합군에 의해 한강 유역을 상실한 해이다.

 

그러나 돌궐의 성장과정을 추적해 보면 551년에 고구려를 공격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삼국사기』의 기록은 551년 이후에 있었던 사실을 전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TAG>   고구려와 돌궐의 전쟁은 중국의 기록에 단편적으로 나온다. 그에 따르면 고구려는 말갈 부족과 더불어 돌궐을 격파했다.

 

돌궐의 고구려 침공은 처음에는 돌궐이 유연의 잔여 세력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듯 하다. 6세기 말~7세기 초 활동하였던 동로마 역사가 시모카테스Simokattes는 유연의 잔여 세력이 중국(북제)으로 도주했고 그곳에서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가 쫓기어 동쪽의 Moukri(고구려)로 갔다고 기록했다.

 

그는 Moukri는 "중국에 인접해 있다. Moukri인들은 위험에 대처하는 강인한 정신력과 매일매일의 신체단련으로 그들의 투지는 매우 높았다" 고 하였다. 동로마 제국은 돌궐과 비단을 매개로 교류하였던 관계로 돌궐을 통해 고구려에 대한 지식이 전해졌고, 이로 인해 동로마 문헌에 이러한 기록이 남았다 (568년 돌궐의 사신이 비잔티움에 도착한 것이 최초의 접촉이었다).


  '고구려인들은 … 매일매일의 신체단련으로 그들의 투지는 매우 높았다' 라는 동로마의 기록은 중국의 역사서인『구당서舊唐書』에 나오는 기록과 일치한다.

  각 거리마다 큰 집을 지어 경당 堂이라 부른다. 자제子弟들이 결혼할 때까지 밤낮으로 이곳에서 독서와 활쏘기를 익히게 한다. (『구당서舊唐書』「동이 열전」고구려)

  고구려로 이주한 유연으로 말미암아 돌궐과 고구려 사이에 전단(戰端)이 일어났을 가능성은 충분히 상정해 볼 수 있다. 또한 고구려와 돌궐은 두 나라 사이에 있는 거란족과 말갈족을 복속시키려는 과정에서 충돌하여 오랬동안 적대국으로 지냈다. 중국 역사서에서 단편적으로 이러한 모습이 보인다.

  … 왕년에 이계찰(利稽察)이 고구려·말갈에 크게 격파되고 … (隋書, 突厥傳)

  이 기록은 돌궐이 고보녕(高保寧 ; 북제 말기에 영주자사가 되었고, 북제가 멸망하자 북주와 그 뒤를 이은 수에 투항하기를 거부하고 독립세력으로 있었음)과 연합하여 581~582년에 수를 침입, 수군을 격파하자 이에 격분한 수 문제 양견이 582년에 내린 조서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계찰(利稽察)에서의 '察'은 돌궐의 관직명 '샤드(Shad)'를 뜻하며 設, 殺, 煞로도 표기된다. 돌궐 제일 제국에는 28관등이 있었는데 Shad는 야브구(Yabgu, 葉護 ; 제 2왕)다음의 제 2관등이다. 이 자리는 돌궐 왕족에게만 주어지는 것으로 그 직능은 '別部領兵者' 로 부족을 거느리면서 부족민을 지배하였다.

 

 고구려가 돌궐의 이계찰을 격파한 것은 돌궐의 동진을 성공적으로 막았음을 보여주는 일이다. <#TAG>   북위는 534년 동서로 분열되고 동위東魏와 서위西魏는 각각 북제(北齊, 550년 건국)와 북주(北周, 557년 건국)로 이어졌다. 이러한 중국 북조의 내분기에 건국한 돌궐은 유연과 달리 북조에 우월한 지위를 누렸다(북위에 눌렸던 유연도 북위가 동서로 분열하자 잠시동안이나마 우위를 누렸다).


  돌궐은 건국 무렵부터 서위와 동맹관계였고 서위를 계승한 북주와도 동맹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돌궐은 늘 창구를 열어 놓았고 돌궐을 중립화 내지 자기편으로 만드려는 북제의 헌상을 받았다. 이에 따라 북주도 부지런히 헌상을 하였고 북주의 태조는 무한 카간의 딸을 황후로 맞이하는 굴욕을 자청하였다(565).

 

당시의 외교 관례상 외국 공주를 후궁이 아닌 황후(皇后)로 영입하는 것은 하위 신분임을 공식 천명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연이 강성할 때 처음에는 서위가, 나중에는 동위가 유연의 공주를 각각 황후로 맞아들인 것은 유연의 세력을 이용하여 상대를 제압하려는 궁여지책이었다. 북주와 북제는 서로 돌궐 공주를 맞아들이려 다투다가 북주가 승리를 거두었다. 분열로 열세에 놓인 중원 국가들이 스스로 굴욕을 자청한 셈이다.

  돌궐 제국의 위세를 떨친 무한 카간은 572년 사망했다. 그의 공적과 당시 국제사회에서의 위상은 돌궐 비문에 잘 나타나 있다.

  사방에 군대를 보내어 모든 종족을 복속시키고, 머리를 가진 자는 머리를 숙이게 하고, 무릅을 가진 자는 무릅을 꿇게 하셨도다. 앞(동)으로는 킨칸 산맥에, 뒤(서)로는 철문(鐵門) 에 이르기까지 돌궐 민족이 지배하는 돌궐 국가가 되었다. 그는 현명한 군주였다. 용감한 군주였다. 신하들과 귀족, 백성들도 모두 현명하고 용감하였다. ― 외투켄에서 거행된 그의 장례식에는 사방의 국가와 종족이 모두 슬퍼하며 조문 사절을 보냈다. 중국, 티벳, 비잔틴, 아바르(유연), 거란 그리고 고구려 등등 ―

  무한 카간을 이어 그의 동생인 타파르(Tapar, 陀鉢, 재위 572~581)가 카간이 되었다. 그의 즉위후에도 한동안 돌궐의 중국의 북조에 대한 우위는 유지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주서周書』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당시 제나라와 교전할 때라 해마다 군대를 동원하였기 때문에 매번 돌궐과 연결하여 외원으로 삼았다. …… 이래 그 나라는 부강하여 중국을 능멸하려는 뜻이 있었다. 조정은 화친을 맺고도 해마다 십만필을 주었으며 수도에 있는 돌궐인을 모두 후히 대접하니 비단옷을 입고 고기를 먹으며 (호화스럽게) 사는 자가 수천명이었다.

 

 제나라는 그들의 침략이 두려워 역시 나라 살림을 기울여 증물贈物을 보냈다. 타파르(陀鉢)는 더욱 교만해져 그 부하들을 거느리며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즉 "우리에게 남쪽의 효순孝順한 두 아이 놈(북주와 북제)만 있다면 무었 때문에 재물이 없을 것을 걱정하겠는가?"<#TAG>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577년 북주가 북제를 합병하여 북중국이 통일되었다. 돌궐은 즉각 북제 부흥을 내걸고 북주를 공격하였다.

 

아직도 돌궐의 군사적 우위는 여전했으나 곧 이어 유목 국가에서 일어나기 쉬운 국가 분열이 일어났다. 일 카간의 동생으로 돌궐 서부를 다스리던 이스테미 야브구는 576년 사망하였다. 그의 뒤를 이은 아들 타르두(Tardu, 達頭, 재위 576~603)는 동부 돌궐의 종주권을 인정한 아버지와 달리 완전 독립을 추구했다. 우선 야브구 위에 오른 직후 타파르 카간의 통제를 단호히 거부하고 스스로 카간으로 행동했다.


  581년은 중국과 돌궐에 큰 전환점이 된다. 이 해에 동돌궐에서는 타파르 카간이 사망하고 계승분쟁이 일어났으며, 북주에서는 외척 양견이 제위를 찬탈하여 수를 건국하였다. 카간 자리를 놓고 타파르 카간의 아들 안로(Anro, 菴羅)와 조카인 탈로핀(Talopien, 大邏便)이 경쟁하였다.

 

 탈로핀은 처음에 타파르 카간에 의해 카간으로 추천되었으나 돌궐의 귀족 회의 (Toy)는 그의 모친이 돌궐계가 아니라는 이유로 카간 자격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안로가 즉위했으나 이번에는 탈로핀 측이 강력히 반발, 결국 타협하여 콜로 카간의 아들인 이쉬바라(Ishbara, 始波羅, 재위 581~587)에게 양위하였다.


  이쉬바라는 안로에게 제 2 카간 칭호를, 다로빈에게는 아파 카간(Apa Qagan) 이란 칭호를 주어 단결을 도모했다. 그러나 다로빈은 서부 돌궐의 타르두에게 가서 자신의 입지를 확보하려 했다. 이쉬바라의 하툰(可敦 ; 황후)은 북주의 천금(千金) 공주였는데 가문의 복수를 주장하는 그녀의 영향력으로 돌궐은 수와 교전하게 되었다.


  돌궐과의 전쟁은 수의 창업주 수 문제 양견(재위 581~604)에게 큰 위협이었으므로 돌궐 의 분열시키려 즉시 돌궐 서부의 타르두에게 접근하여 돌궐 카간으로 인정하였다. 이쉬바라카간은 중국과 돌궐 서부를 적으로 상대하는 부담을 안게 되었다. 이쉬바라는 우선 자신의 통치 영역에 있는 다로빈의 근거지를 초토화시키고 추종 세력을 소탕하였다.

 

 결국 582년 타르두가 동부 돌궐의 카간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선언하여 돌궐은 공식적으로 동서로 양분되었다. 돌궐은 분열되고 북중국은 통일되니 돌궐, 특히 동돌궐의 열세는 분명해졌다.


[출처]http://kin.naver.com/knowhow/entry.php?d1id=10&dir_id=10&eid=3IOJAl7G83fSknYfYtfG1G11RAseBkRo&qb=sO2xuLfBv80gtbmxyA==&enc=euc-kr&pid=fQj%2Fhloi5TGssZQd72Zsss--452232&sid=Sfa-YsGb9kkAAECaoxA
Posted by 다울의 꿈
'터키'하면 형제의 나라라는 수식어가 떠오르지만
실제로, 그렇게 불리어지는 이유를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6.25 때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병력을 파견했다고.

그렇다면 '왜?' 그렇게 많은 병력을 파견했는가.. 라는 질문을 하면 그들은 대답하지 못한다.
그건 궁극적인 이유가 될 수 없다.

터키인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투르크'라고 부른다.
우리가 코리아를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것처럼.

역사를 배웠다면 고구려와 동시대에 존재했던 '돌궐'이라는 나라를 알고 있을 것이다.
투르크는 돌궐의 다른 발음이며 같은 우랄 알타이 계통이었던 고구려와 돌궐은 동맹을 맺어 가깝게 지냈는데 돌궐이 위구르에 멸망한 후, 남아있던 이들이 서방으로 이동하여 결국 후에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건설하게 된다.

원래, 나라와 나라사이엔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는 법이지만 돌궐과 고구려는 계속 우호적이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서로를 '형제의 나라'라 불렀고 세월이 흘러 지금의 터키에 자리잡은 그들은 고구려의 후예인 한국인들을 여전히 형제의 나라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즉,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형제의 관계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의문점 하나.
우리는 왜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까?
그리고 터키인들은 왜 아직도 우리를 형제의 나라라고 부를까?

답은 간단하다.
역사 교과서의 차이다.

우리나라의 중,고 역사 교과서는 '돌궐'이란 나라에 대해 단지 몇 줄만 할애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돌궐이 이동해 터키가 됐다느니 훈족이 이동해 헝가리가 됐다느니 하는 얘기는 전무하다.

터키는 다르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경험했던 터키는 그들의 역사를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학교에서 역사 과목의 비중이 아주 높은 편이며 돌궐 시절의 고구려라는 우방국에 대한 설명 역시 아주 상세하다.
'형제의 나라'였다는 설명과 함께.
그래서 대부분의 터키인들은 한국을 사랑한다.
설령 한국이 그들을 몰라줄지라도..

실제로 터키인들은 한국인들 역시도 그들과 같은 생각을 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한국인들도 터키를 형제의 나라라 칭하며 그들을 사랑할 것이라 믿고 있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88 서울 올림픽 때 터키의 한 고위층 관계자가 한국을 방문했다.
자신을 터키인이라 소개하면 한국인들에게서 큰 환영을 받을 것이라 생각했으나 그렇지 않은 데 대해 놀란 그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물었다.

'터키라는 나라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돌아온 답은 대부분 '아니오'였다.
충격을 받고 터키로 돌아간 그는 자국 신문에 이런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한다.

'이제.. 짝사랑은 그만합시다..'

이런 어색한 기류가 급반전된 계기는 바로 2002 월드컵이었다.
'한국과 터키는 형제의 나라, 터키를 응원하자'라는 내용의 글이 인터넷을 타고 여기저기 퍼져나갔고 터키 유학생들이 터키인들의 따뜻한 한국사랑을 소개하면서 터키에 대한 한국인들의 관심이 증폭되게 되었다.
6.25 참전과 올림픽 등에서 나타난 그들의 한국사랑을 알게 된 한국인들은 월드컵을 치르는 동안 터키의 홈구장과 홈팬들이 되어 열정적으로 그들을 응원했다.

하이라이트는 한국과 터키의 3,4위전.
자국에서조차 본 적이 없는 대형 터키 국기가 관중석에 펼쳐지는 순간 TV로 경기를 지켜보던 수많은 터키인들이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한다.
경기는 한국 선수들과 터키 선수들의 살가운 어깨동무로 끝이 났고 터키인들은 승리보다도 한국인들의 터키사랑에 더욱 감동했으며 그렇게.. 한국과 터키의 '형제애'는 더욱 굳건해졌다.

우리는 이유를 알아야 한다.
터키가 형제의 나라가 된 궁극적인 이유를 모르면 KBS의 어느 아나운서가 패널이었던 터키인에게 '아우님'이라 불렀던 어리석은 짓도 가능한 것이다.
형제는 '형과 동생'을 따지자는 말이 아니다.
그들에게 형제는 곧 친구며 우방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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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의 언어에는 순우리말과 비슷한 단어가 참 많습니다.

말뿐 아니라 음식, 문화, 습성, 국민정서 (터키인 우월주의에, 감정적 다혈질이면서 반대로 다정다감하고, 거나하게 놀기 좋아하고, 어쩜 그렇게 성질 급한 것까지..)도 상당히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유럽인치고는 흔하지 않게 몽고반점도 있습니다.



과거 돌궐(투르크 => 터키)과 고구려는 그냥 우방이 아니라, 이와 잇몸 같은 관계였다고까지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돌궐의 공주와 결혼을 하였을 정도니까요.

고구려 멸망 후 돌궐도 망했으며 서쪽으로 옮겨 서돌궐을 건국하게 됩니다. 서돌궐이 훗날 오스만 제국... 그리고 터키가 됩니다.

혈통이 고구려와 혼혈이라고 생각하시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역사 교과서에서 돌궐을 다루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돌궐의 위치 때문이 아니였나 생각됩니다.
사서에는 고구려와 돌궐이 국경을 맞대고 있는 것으로 기술되어 있는데, 당시 돌궐은 중앙아시아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영토가 중앙아시아, 즉 실크로드(서안) 부근까지가 영토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리고 돌궐은 만주 지역에까지 영토를 넓힌 적도 없습니다.
따라서, 고구려의 영토가 만주와 한반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중앙 아시아 까지(돌궐과 맞닿은), 매우 방대했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중국이 동북공정에 더욱 박차를 가하는 이유도 여기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보면 '터키'라는 나라는 과거 청동기시대인 배달국, 고조선, 부여 시대에는 동이족에 속해 있다가 고구려의 세력이 확장되면서 고구려가 부여를 정벌하자 그곳에 살던 원주민(예맥 동이족)들이 요하를 건너가 이루게된 민족입니다.

돌궐족은 중국의 대부분을 수나라가 통일하자 고구려와 돌궐은 연합하여 수나라를 공격하게 됩니다. 그러나 오히려 수나라의 침략을 받아 요서지방은 수나라에 점령되고 돌궐은 서쪽으로 쫓겨나게 되는데 그들이 서쪽으로 이주해 정착하여 오스만-투르크 제국을 건설하였고, 아랍과 발칸반도를 지배하며 강성했던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19세기 중반부터 쇠퇴하면서 주변의 영토를 잃고(소수민족 모두 독립) 지금에 터키만 남게 된 것입니다.

같은 우랄-알타이 계통의 언어를 사용했지만 통일신라시대 이후 우리는 중국의 영향으로 한문을 사용했고, 터키는 아랍의 영향을 받아 언어는 전혀 다르게 발전하게 됩니다.


유전학이나 인류학적으로도 터키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몇개 안되는 북방계 몽골리언국가(몽고, 한국, 일본, 에스키모, 인디언) 중 하나로, 헝가리 와 함께 북방계 몽골리언의 유전자가 많이 남아있는 유럽국가입니다.

터키인은 '코리아'의 어원이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의 영문표기라는 것까지도 알고 있습니다. 대단한 형제사랑이지요..

그렇다면, 북한도 같은 민족인데 어째서 한국과 형제인 터키가 6.25 때 남한편에만 병력을 파병했을까..

한국과 일본의 관계만큼이나 아르메니아인들과 터키는 견원지간입니다. 아니, 원수지간이라는 말이 더 적절하겠네요.

과거 아르메니아인(오스만 기독교인들)들이 터키인(투르크 이슬람교도)에게 대학살을 당했기 때문이지요.

과거 오스만터키에서 소수민족들이 독립을 하면서 쇠약해진 국력과 맞물린 굴절된 민족주의로 말미암아 아르메니아인 수천명이 죽임을 당하는 1차 대학살의 참사가 벌어집니다.
유럽으로 남진하려하는 러시아의 힘을 얻어 루마니아와 세르비아가 독립을 하게되고 오스만터키의 아르메니아 영토 대부분을 러시아가 차지하는 셈이 되자 이에 분노한 투르크인들이 러시아와 붙어먹은 아르메인들을 표적으로 인종청소라는 대학살을 감행한거죠.

1차 대학살 20년후 또 다시 오스만터키 정부의 도움을 받은 투르크 이슬람교도들은 아르메니아인 5만명에 대학살을 자행합니다. (2차대학살) 게다가 정부는 학살된 아르메니아인 외 175만명을 추가로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로 추방하고 그 추방하는 과정에 60만명이 사막에서 목숨을 잃게 됩니다.

(1894년~1915년까지 250만명이였던 아르메니아인은 30만명만이 살아남게 됩니다.)

그후 1912년 발칸전쟁 때 몬테니그로, 불가리아, 그리스가 오스만터키에서 독립할 때도 알게모르게 러시아가 개입하여 아르메니아인을 도와줍니다. 따라서 러시아가 북한을 지원하기 때문에 당연히 터키는 그 반대 쪽인 남한에만 병력을 파견한 거지요.



물론 혹자는 당시 터키가 미국과의 우방적 연계로 말미암은 국제적 이득을 노린 선택일 뿐이였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역사의 흐름이라는 큰 범주에서 바라본다면,
터키가 2차 세계대전 때 우리의 동맹국 중의 하나였던 이유가 필연적으로 러시아와 적대 관계일 수 밖에 없는 과거사 때문이였다고 보는게 타당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형제의 나라..

한국의 경제성장을 자기일처럼 기뻐하고 자부심을 갖는 나라, 2002년 월드컵 터키전이 있던 날 한국인에게는 식사비와 호텔비를 안받던 나라.. 월드컵 때 우리가 흔든 터키 국기(國旗)가 터키에 폭발적인 한국 바람을 일으켜 그후 터키 수출이 2003년 59%, 2004년 71%나 늘어났다는 KOTRA 통계가 있습니다.

이런 관계를 지닌, 자기 나라로부터 수백만리 떨어진 곳에서 보내는 의리와 애정을 받는 나라가 세상에 몇이나 되겠습니까.
Posted by 다울의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