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대 중반이신 아버님이 왼쪽 엉치 밑 다리부분이 불편하시다고 해서 강* 세*란*로 검사 및 치료를 다니신지가 어언 6~7개월이다.

증세인즉슨 100여미터를 걸으면 왼쪽 엉치밑으로부터 다리가 불편해서 절뚝거리면서 걷고, 쉬었다 걷지 않으면 걸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동네 병의원(개인,종합)에서 X레이 검사도 받아보고, 치료도 받아봤지만, 의사들은 딱히 원인을 찍어내지 못하고, 물리치료를 권하는 수준으로 거의 1년 여를 보내오셨다.
갈 수록 몸의 불편함으로 호소하시고 해서 형과 나는 아버지 소망대로 큰~병원에 가서 검사 및 치료를 받아보기로 하고 강* 세*란*에 진료 예약을 신청하였다. 그리고 진료과목은 아버지가 척추쪽 문제로 의심하는 관계로 척추전문의인 김** 박사님을 지명하여 예약하였다.

김박사님과 1차 진료상담을 하고 MRI와 CT, X레이 촬영을 하기로 했다. 지명예약에다 촬영비용하니까 돈 백은 우습게 넘어갔다. 촬영 후 만난 김박사님은 친절하고 세련되며 총명해 보이는 모습으로 아버지 몸 속 구석구석을 3D 입체 영상으로 보여주시며, 척추쪽은 전혀 문제가 없다고 하신다. 동네 병의원 의사들과 똑같이 아버지 다리의 불편함에 대한 원인이 정확히 이거다라고 말할 것이 없다고 소견을 밝히신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여전히 불편해 하시며 뭔가 대책이 없냐고 요구하니까, 우선 한 달 정도 약을 복용해 보고 다시 만나잔다.
그래서 약을 한보따리 타서 한 달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전쳐 차도가 없다.

또 다시 만난 김박사님은 약을 먹었을 때 전혀 증세의 호전이 없었냐고 묻고, 아버지는 없었다고 하시고...
난감함이 김박사님의 얼굴을 스쳐 지나간다.
내 짧은 생각으로 신체가 노후화되어 원인없이 아픈 그 무엇이 아닐까... 그래서 마땅한 치료 방법이 없는게 아닐까 하며 김박사님의 입장이 되어 보았다.
그 상황에서 다시 아버지의 입체영상을 보며 김박사님이 지적하는 것은 왼쪽 엉치쪽 아래의 다리 혈관 하나가 거의 협착이 되어있기는 한데, 굉장히 부분적이고, 만약 그게 원인이라면 협착된 부분부터 아래쪽으로 쭈욱 가늘어져 있어야 하는데 부분적이라 원인이라 단정짓긴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한 번 더 약을 써보고, 담배가 가장 안좋은 원인이니 담배를 끊으라는 권면과 함께 또 한번의 진료를 마쳤다.

그로부터 또 3~4주 뒤 약속된 진료일이 되어서 병원을 또 찾았다.
아버지는 주위 친구분들한테 들은 정보와 개인적 불편함에 대한 개인적 생각으로 "척추협착"이 아니냐고 김박사님께 계속 물었고, 김박사님은 영상으로 봤을 때 그럴 가능성을 없다고 하고, 지지부진한 답보 상태만 계속 되었다.

김박사님도 뭔가의 대안을 요구하는 환자에게 의심이 가는 것은 다리쪽 혈관사진하고, ??핵 검사를 한 번 더 해보자고 권하시고, 자식된 입장에서 할만큼 했다고 뺄 수도 없고해서 검사예약과 진료예약을 하였다.

또 추가비용 30만원 발생...
검사를 또 하고 혈관담당 의사하고 만나보니, 당장 수술하잖다.
그정도면 다리가 많을 불편했을 거라고...

그 동안 보낸 시간이 넘 아까울 뿐만 아니라 들어간 돈도 만만치 않았고, 에효....
혈관확장이라 심혈관 확장처럼 수술이 아니라 시술로 간단히 끝낼 수 있다고 하여서 수술 동의를 하고 입원하였다.
그 동안을 원인을 다른데로 짐작했던 터라 약간의 당혹감과 어찌할 수 없는 억울함이 있었으나 어찌할 도리가 없이 그냥 넘어갔다.

입원을 하는데, 처음 입원을 진행하는 나로써는 모든 것이 생소했고, 상식적으로 움직을 수 밖에 없었다.
3주 전에 금요일 시술일정으로 못박아 놓고 입원일정을 맞춰달라고 담당 간호사실에 부탁했었다. 주말에 회복하고 퇴원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기 위해....
그래서 입원일로 정해진 날짜가 6월 25일(목)...
입원시간은 핸드폰으로 연락주겠다고 했는데, 그놈의 시간을 정할 수 없다고 한다. 2시에서 4시 사이라는 것만 얘기한다. 거기까진 좋다. 그런데 3주전부터 얘기했는데, 6인실은 없고 2인실로 들어가야 한단다. 6인실은 1일 1만원, 2인실은 1일 13만원.... 2인실은 룸이 있는데, 6인실은 없다니... 상술로밖에는 이해가 안된다.

번호표를 뽑고 입원 수속을 기다리는데, 내 차례가 되어 창구로 갔더니, 입원수속 동의서를 써 내란다. 집에서 써 와도 되었다고 하는데, 그럼 사전에 공지를 하고 알려주던지...

이제부터 강* 세*란*에 대한 불만을 본격적으로 토로해 볼란다.

1. 대학병원에 국내 최고의 시설과 시스템을 자랑하는 병원의 협진체계가 의심스럽다. CT나 MRI를 찍었으면 몸 안의 구석구석 못볼 데가 없는데, 김박사 본인이 척추전문의라 혈관쪽이 자신없으면 심혈관 담당의와 상의해서 환자에게 도움이 될 수 최선의 방법을 찾아 제시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환자가 불편한 것에 대해 의심가는 원인과 해결대안을 제시하고 환자가 선택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는 이도저도 아니고, 오히려 환자 입장에서 뭔가를 자꾸 제시하게 되는 상황은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다. 우리가 병원을 찾고 전문의를 찾는 가장 큰 이유는 최선의 솔루션을 제안받고, 그 중에서 환자의 상태를 호전시킬 수 있는 비용효과적인 해결책을 선택하고 치료받기 위함인데, 그렇지 않음으로 불필요하게 너무 많은 시간과 비용을 지불하게 되었다.

2. 입원수속 절차와 방법에 대한 체계적인 안내가 없다. 단지 어디로 가라라는 지시밖에는...
해당 창구로 가서 한참을 기다리다가 미리 준비해도 되는 것으로 다시 시간을 보낸다. 환자 및 환자 가족에게도 시간은 돈이다. 많은 환자 가족들은 환자의 건강회복이라는 절대절명의 미션을 두고 시간과 생업 등을 잠시 접어두고 입원치료에 집중한다. 병원의 근본적인 목적이 의료서비스라면, 본인들의 행정적 편의보다 고객중심의 사고전환과 실질적 실천이 절실히 필요하다. 동네의 조그만 의원이 오히려 그 서비스는 더 나아보인다. 최소한 눈높이를 맞추려고 노력하니까... 요즘 은행도 창구 밖으로 나와 안기다려도 되는 고객들은 바로 안내하고 시간대기의 부담을 줄여준다.

3. 환자가 입원하면, 치료 및 검사계획 등의 세부일정에 대한 안내 및 브리핑이 필요하다. 우리 아버지의 경우 혈관확장 시술을 금요일에 받기로 하고 목요일 오후에 입원했는데, 간호사 및 담당 레지던트에게 질문을 해도 언제쯤 무엇을 하게될지 아무런 답변을 해줄 능력이나 환경이 안된단다. 그냥 무작정 기다려 보란다. 시간적 오차의 범위야 있겠지만, 순차적으로 진행될 검사 및 진단의 절차는 존재하지 않는가? 담당자 간에 업무분담이 칼같이 되어 있어서 서로 답변을 못해주는 것일까? 최소한 담당 주치의가 존재하고 그가 전체를 코디네이션하지 않나? A4 한 장도 안되는 공간이면 입원 후 어떤 어떤 검사를 받게 될 거고, 대략적 예측시간은 언제쯤이다라는 거 알려줄 수 있는 거 아닌가?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건 특별한 케이스이고, 일반적인 그리고 기본적인 절차와 프로세스는 있을 것이고, 그걸 공유하면 의사나 간호사의 존엄성에 해가 되나?
환자 및 환자 가족의 알권리를 무시하지는 말아야지....

4. 시술이나 수술을 진행하면서 환자 및 가족은 그 어떤 결정권도 가지지 못하는 것일까?
처음 입원을 결정하고 시술에 동의할 때는 아버지의 왼쪽 엉치 아래 혈관 확장을 위해서 였다. 몇 달 동안 담당 의사가 시각적으로 보여주며 의심된 원인으로 보여준 유일한 부분이었으니까.... 그런데 수술 끝나고 뜬금없이 심장쪽의 혈관도 확장 시술을 했단다. 한 번더 언급되지 않았던 부분인데... 심장쪽 혈관 중 하나가 협착되었다는 것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데, 시술 끝나고 시술 전/후 혈관 영상을 보여주면서 이렇게 되어서 이렇게 확장했단다. 나쁜 것을 좋게 개선했다는데, 그걸 가지고 불만을 갖는것은 아니다. 단지, 왜 그 전에 전혀 알려주지 않았냐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시술 중 아주 긴급하게 발생한 사안도 아니고, 의사는 미리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 혈관확장 시술에 있어서 두 단계로 진행한단다. 시술 전날 저녁 때 브리핑을 통해서 알려준 사실이다. 우선 풍선같은 것으로 확장해서 협착부분이 해소되면 그걸로 시술을 마무리하고, 그것으로 안되면 스탠트라는 보정물을 삽입해서 혈관을 확장하고 지지하게 된단다. 풍선만으로 해결되면 바로 입원실로 와서 회복을 하고, 스탠트를 삽입할 경우 중환자실에서 회복을 하게 된단다. 둘 다 기술적으로나 시간적으로 부담이 안되는 간단한 시술이라고는 하지만 바로 입원실로 올라오는 경우와 중환자 실에서 하루 정도 회복하는 것과는 환자 가족 입장에서 비용적인 부분이나 병원 대기 등의 환경적인 준비 및 예측을 해야 하기 때문에 경우가 많이 달라진다. 그래서 시술 전 간호사에게 질문했다. 혈관확장 시술에 들어가서 스탠트를 넣을지 말지를 결정해야 하는 시점에 수술실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 가족에게 안내하고 시술을 진행하냐고? 간호사는 그렇게 한단다. 그래서 수술실 앞에서 수술실 앞 LCD에 제시되는 아버지의 시술진행 상황을 예의 주시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1시간 여 정도 [수술]이라는 단어로 제시되다가 [회복중]이라는 단어로 변경되어 스탠트까지는 삽입하지 않고 끝났구나 하며 안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시술 후 환자 가족을 시술실 안으로 들어오게 하고 담당의사가 시술진행 결과를 설명해 주었다. 스탠트를 넣었고, 심장쪽 혈관까지 확장시술했다고... 참 어처구니 없죠잉~ 아버지는 당연히 중환자실로 옮겨지고, 비용적인 부담도 만만치 않고...
무사히 시술이 끝나고 환자가 건강해진다는 기쁜 소식 뒤에 환자가족이 감당해야 하는 부담의 헤머가 현실이 되는 순간이고, 이건 병원이 가지는 잔인한 폭력성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종합하자면, 병원에서의 환자 및 그 가족은 소통의 대상이 아니라는 생각에 왠만해서는 가지 말아야지 하는 마음만 갖게 한다. 돈만 먹는 하마다. 3박 4일 입원하고, 1시간 짜리 시술받고, 병원비가 320만원 나왔다. 그 전 검사 및 진료비까지 합치면 5백만원 정도가 들어갔다. 의료보험되어서 이 정도니.... 나나 우리 형은 아주 평범한 서민이다. 그래서 그 5백만원은 몹시 부담되며, 병원비 마련을 위해서 몹시도 허리띠릴 졸라 메거나 약간을 빚을 내어서 감당해야 하는 상황이다.  병원비도 퇴원직전에야 통보받고...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은 안다. 환자마다 회복하는데 있어서 다양한 변수가 존재하니...
하지만 일반론에 입각해서 입원전 예측되는 비용의 최대,최소를 대략치로 알게할 수는 있을 것이다. 환자 치료 및 시술에 대한 종합계획이 설 수 있다면....
그 시설 좋고 시스템 좋다는 강* 세*란*가 이걸 못해낸다는 것이 이해가 안간다. 신촌의 연* 세*란*는 뭐라더라... 유비쿼터스 병원... 뭐 어쩌구 저쩌구하며 최첨단화된 병원 시스템을 자랑하더만...
의사들이 귀찮은건가? 게다가 리스크를 안지 않으려고 하는 안정주의적 치료만 하려고 해서 그런가? 또 병원 매출의 극대화를 위해 아픈 환자를 볼모로 영업을 하는 것인가?
대한민국 서민으로서의 환자는 절대약자다. 그래서 의사 기분 얹짢게 하는 언행은 알아서 삼간다.
그래서 이 글도 아버지의 치료가 끝난 시점에, 앞으로 어떤 불이익도 생기지 않을 상황에 그 동안의 불만을 한데 모아서 쓴다.

아.. 하나만 더 첨언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흰 까운 입은 의사들의 친절 서비스를 권하고 싶다.
환자로서의 고객이 있어야 본인들의 가치가 서는 것이 아닌가? 권위적인 표정과 행동은 존경스러움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개**라는 욕만 입에서 되내이게 한다.
아주 기본적인 매너도 안된 의사를 봤다. 뭐가 급한지 모르겠는데, 1층에서 검사를 받고 몇 명의 환자들이 링거 거치대를 들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고 있었다. 일반용 엘리베이터로... 7층 문이 열리고 환자들과 보호자들이 내리려고 하는데 한 젊은 의사가 먼저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거동이 부자연스러운 환자들을 멈칫 서게 하고... 정말 미친놈이었다. 어차피 다 내려야 자기가 갈 수 있는데.... 먼저 내리고 탑승자가 나중에 타는 것은 유치원생도 아는 상식인데, 그걸 모르는 인간이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하고 의사짓을 한다고 하는 것인지...

또 하나의 눈꼴 사나운 것은 담당 레지던트의 태도다. 이제 20대 중 후반정도... 나보다도 한참 어린 친구다. 내 아버지는 70대 중반... 의사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입장이지 환자에게 군림하는 입장은 아니다. 그런데, 환자를 살핀다고 와서는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어서 눈에 거슬리는 자세로 환자의 상태에 대해 질문한다. 동방예의지국에서 자기 아버지 뻘보다 한참 더 되시는 분한테 공손하고 바른 자세로 심신를 편안해 해 줘야 하는데, 심기를 불편하게 한다. 의사나 간호사나 매너 교육은 필수라고 본다. 인성검사도 그렇고...

내가 경험해본 병원이 그리 많지 않아 특정 병원만 언급했다. 모두가 그렇지 않겠지....하는 작은 되뇌임으로 마무리한다. 제발 병원도 서비스업임을 명심합시다. 그리고 의사분들의 사회적 존경과 당신네들의 연봉 수준은 대한민국 평균보다 상당히 상회함을 인지하고, 그에 맞게 품의와 격을 지켜주시길 당부합니다.
Posted by 다울의 꿈
나도 대한민국의 평범한 아빠인가 보다.
자고로 자식의 부모의 명예라 했던가...ㅎㅎ

태우와 예원이가 다니는 광문초등학교에서 금주에 독서 골든벨을 했다.
예원이는 1학년이라 6월 15일(월), 태우는 3학년이니까 6월 17일(수)....

첫 기쁨의 소식은 예원이가 보내줬다.
반 예선을 거쳐 학년 본선에 진출... 마지막 3명이 남을 때까지 승승장구 했단다. 문제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정답이 "2달"인데, "2일"이라고 써서 아쉽게 탈락했단다.
여하튼 마지막 3인에 속했다니, 아빠로서는 자랑스럽기 그지 없다.
마지막 골든벨을 울렸으면 더 좋았겠지만, 최선을 다했고, 본인 스스로 아쉽게 떨어진 것 때문에 어린애처럼 굴지않고 당당했으니 더 사랑스럽다.

태우가 걱정되었다.
1,2학년 때도 본선에 나가긴 했지만, 예원이가 거둔 마지막 3명에는 들지 않았기에, 오빠로서 자존심 상할 성적이 나오면 어떻게 하나하며...
게다가 태우가 읽고 있는 독서골든벨 책 중에 "관혼상제"라는 동화책은 내가 읽어도 어려운 내용이라 태우가 얼마나 내용을 소화해 내고 기억해야 할 것들을 잘 이해해서 기억할지 걱정되었다. 아닌게 아니라 다른 동화책은 쉽게 재밌게 잘 읽어나가더니, 그 책만은 잘 손에 데려고 하질 않았다.
그 이유야... 당연히 어려우니까...

수요일이 되었고, 아침에 출근하면서 태우와 화이팅했다.
태우가 노력하는 모습을 아빠는 봤으니까, 최선만 다하라고.... 속으로야 골든벨 울리기를 간절히 바랬지만^^;;;;
오후 1시가 넘어서 태우에게 전화가 왔다.
반예선은 100점을 맞아 통과했고, 3학년 본선에서 마지막 2명 남을 때까지 올라갔는데, 마지막 문제에서 틀렸다고....
안도의 한숨과 함께 태우가 자랑스러웠다. 그 정도를 해내다니.... 나도 참 푼수 아빠다.
마지막 문제 정답은 "뒷간"인데, 태우는 "헛간"이라고 썼단다.
자슥... 헷갈릴만했네.ㅎㅎ

건강하게 잘 자라 준것만 해도 고마운데, 좋은 성적표까지 아빠에게 갖다 주니 넘무 고맙고 감사하다.
게다가 예원이는 오빠의 성적을 축하하고, 격려한다.
많이 컸다. 예전의 예원이면, 오빠의 성적을 시샘하고 삐졌을텐데...
성격이 많이 둥글둥글해졌다. 이쁘게도.

모든 부모가 자식에게 기대를 걸 것이다. 또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자녀들은 노력할 것이다. 그대로 되는 집이 있고, 안되는 집이 더 많고...
그런데, 난 참 행운아다.
태우가 태어나고, 예원이가 태어나고, 자라나면서, 내 머릿속에 그려진 이미지대로 아이들이 성장하고 있다.
내가 기대하며 하나님께 기도하고, 권면하며 생각하는대로....

아직은 어린이의 모습을 많이 가지고 있어서 순수하면서도 아이같은 유치함도 많이 드러내지만, 하루하루가 가고, 어른스러워지면서 순수함은 조금씩 줄어들겠지만, 아이같은 유치함도 성숙함으로 채워지고, 나보다 남을, 그리고 이 사회를 넉넉히 껴안으며 성장할 것으로 기대한다.
그리고 그렇게 될 것이다. 아이들 잠자리에서 늘 그렇게 기도하니까....

행복한 하루다.

Posted by 다울의 꿈
저자 : 유시민(전 보건복지부 장관)
출판사 : 푸른나무

구입일 : 2009년 6월 1일
구입이유 : 노무현 대통령 선거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유시민, 노무현 키워드로 검색된 책을 구입(노무현 왜 조선일보와 싸우는가? / 거꾸로 읽는 세계사 / 상식 혹은 희망 노무현 / 유시민의 경제학 카페 / 유시민의 대한민국 개조론 ... 읽고 있는 순서)

참 오래 전부터 저명했던 책인데, 이런 저런 핑계로 읽지 못했던 책을 노무현 대통령의 안타까운 죽음과 당신의 죽음을 몰아간 비상식의 세상에 대해 좀 더 각성하며, 깨닫기 위해 한 페이지씩 읽어 나갔다.

현재의 세계에서 전혀 주류에 다루어지지 않았던, 특히 광복 이후 남과 북의 허리가 잘리면서 냉전의 이데올로기 세상을 살아가는 대한민국에서, 더더욱 미국을 뒷배로 해서 반공이 아니면 살아갈 수 없는 이 땅에서 금기시 되었던 많은 역사적 사실들을 마음 껏 접할 수 있는 좋은 시간들이었다.

그 예전 대학시절 읽었던 조정래님의 태백산맥이나, 그 뒤에 나온 한강을 읽을 때의 느낌과 너무도 비슷한 공감대가 형성되었다고나 할까.
민족주의자로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이 된 백범 김구 선생님이나, 태백산맥이나 한강의 주인공들, 그리고 이 책 속에 다루어진 수많은 사람들이 다 같은 맥락 속의 인물들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상식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했는데, 좌우의 이데올로기 프레임 속에서 기회주의자 내지는 반대편의 이데올로기를 가진 것으로 판단내려지는 안타까운 현실들에 안타까움을 금할길이 없다.

민주주의... 사회주의...자본주의... 공산주의...
그 어느 주의 하나 아래로부터의 진정한 선택이 주어질 기회는 역사적으로 없었다.
혹, 있었다 하더라도, 스탈린처럼... 모택동처럼...김일성처럼 또 다시 권력의 힘에 사로잡혀 새로운 체제를 역사적 구습으로 만들어 나간다.
인간이 가지는 이기적 노력들이 인간역사의 선순환적 흐름을 망쳐놓는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충분히 신뢰받고, 존중받아야 하는 인격임에는 부인할 수 없지만, 나의 이익앞에 나를 객관화시킬 수 있는 성인들이 매우 희소한 세상에서 충분히 자기 중심적인 인간들의 선택에 부정적 견해가 생겨나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하지만, 더 중요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 어떤 이즘도 민중이 선택해 본 적은 없다는 것이다.
민중은 그네들의 편에 서서 그들과 함께 소통하고 공유할 수 있는 체제를 선망했을 뿐이다.
하지만 현실은 권좌에 오른 누군가의 이데올로기와 그 정권이 선전하는대로 순응하며 살아가면 모범시민, 오류와 폐단을 고치자고 부르짖으면 반동으로 분류하여 편가르기를 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어떤 이데올로기든 "소통"이 단절되는 순간 독재가 되고, 독재적 체제 하의 민중은 지배의 대상일 뿐 소통과 화합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전제 군주국가라 할지라도 군주가 백성과 소통할 자세가 되어있으면 군주는 백성의 민의를 치세에 반영할 수 있고, 간신배로 인해 소통과 언로가 막혀 버리면 그야말로 악정이 펼쳐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반대로 민주주의 사회라고 얘기하는 체제에서도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사회는 무엇이든 국민적 소통이 되면 안되는 이유가 있는 것이고, 그 이유는 분명 역사적으로 떳떳하지 못한 자기네만의 세상을 위한 것이며, 그로 인해 단절과 분열의 폐단만 불러일으키는 사회가 되는 것이라고 본다.

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에서 진실을 가리려는 조직적 담합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뤄야 하고, 또 그것을 최대한 은폐하기 위한 연속적 거짓을 만들어 내야 하는지를 보았다. 하나의 진실을 감추기 위해 열 개의 거짓을 만들어 내야 하며 평범한 인격을 파렴치한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나 아닌 남은 충분히 희생될 수 있는 소모품 내지는 부품으로 보아 넘기는 비인간적인 모습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건이라 생각한다.
그래도 프랑스는 자유,평등,박애의 정신을 가진 나라라고 하는데, 국제적 망신거리요, 역사적 오점을 남겼으니....
하지만 진실은 승리했다. 감추고 싶었던 드레퓌스 사건의 진실은 역사 속에 명확히 기록되었다. 드레퓌스는 범죄자가 아니었다고...
그가 가진 출신성분(유태인)이 그를 마녀사냥했지만, 역사는 그의 무죄를 증명해 냈다.

우리가 치르는 전쟁의 내면을 들여다 보면서, 명분 속에 감추어진 국가적 이기주의를 엿볼 수 있 있었다.
베트남 전쟁에서 보여준 미국의 명분없는 전쟁 개입과 광신적 반공주의를 보았다. 민족의 문제를 민족적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국제사회의 역할인데, 미국은 너무 거만했다. 또 속이 너무 보였다. 신제국주의로 자기네 관리영토를 넓히고자하는 야망 속에 펼쳐지는 전쟁... 누구도 환영하지 않는다. 청교도적 신념 속에 세워진 나라이기에 참 많이 동경했고, 항상 우리편이라는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그 환상은 여지없이 깨지고 사람사는 나라가 아닌 정치와 야합이 대세인 나라라는 생각밖에 안든다.
우리가 미국을 이야기할 때, 미국의 뒷골목은 아무리 타락해도 상위 계층의 '노블리스 오블리제' 정신과 미국의 건국이념인 청교도주의가 미국을 튼실하게 받쳐주고 있다고 한다. 나도 그렇게 내 아이들에게 설명했었다. 그네들의 이중적, 양면적 양심은 참으로 논하기 어렵다.
철저한 청교도적 기독교 세계관으로 탄생한 나라며, 최초 이주민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왔을 때, 그들은 신앙 공동체로서 우선 교회와 학교, 병원 등의 공공성 기관을 세우고, 각자의 삶의 터전을 가꾸어 나갔다고 한다. 그래서 이주 첫 해는 몹시 배고팠으며, 그 모든 어려움을 겪고 맞이한 이듬해의 추수는 하나님 앞에 너무도 감사해서 지금의 가장 큰 절기 중 하나인 추수감사절이 탄생한 것이 아닌가?
그리고 대통령 취임시 대통령 선거를 할 때 성경책에 손을 얹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그 업무를 신실하게 수행할 것을 선서한다.
그런 나라의 그런 대통령이 억압과 착취, 침탈의 정치를 해나간다는 것에 비애감을 금치 못하겠다.

"거부하는 팔레스타인"을 읽으며 기독교인으로서, 그리고 헐리우드 영화에서 얘기한 정의에 대해 익숙한 나로써 아랍인에게 참 미안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아랍민족 = 테러리스트라는 등식으로 그들을 판단하게끔 우리 주변의 매체들은 충성을 다해왔다.
지금의 팔레스타인땅은 분명 성경상 아브라함으로부터 약속의 땅으로 성경에 언급되었고,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까지는 그 지역을 생활의 터전으로 살아온 것도 분명하다. 하지만 지난 100년 전까지의 주인은 평범하게 농사짓고, 양을 키우는 아랍인들의 땅이었다.
우리가 고조선과 고구려가 가지고 있었던 만주땅을 작금에 우리 땅이라 주장하며 외교적으로 관계를 풀고, 우리 국민을 이주시킬 수 없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 없어서인가? 우리가 외교력, 국제사회에서의 힘이 없어서인가?
그 땅을 차지할 마땅한 명분이 없어서인가? 국제사회는 민족국가가 성립되면서 국경선을 그었고, 그것을 인정하며 국제사회 안에서 동반자적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간다. 한 나라가 다른 나라의 영토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며 침공하면, 국제사회가 들고 일어나 그 형평을 가려준다. 그런데, 유태인에 대해서는 많은 부분이 예외다. 그리고 땅을 빼앗긴 자들의 설움과 그로인한 폭력성을 테러로 규정하며 외교적 고립을 만들어 낸다. 헐리우드 영화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테러 속의 주인공은 아립민족이다. 우리는 그것을 보며 아랍=악이라는 등식으로 고정관념화 시킨다.
유태인의 뒷배는 미국이라는 사실... 삼척동자도 안다. 국가적, 민족적 이기주의 앞에 국제사회는 입을 다문다. 그들의 힘이 세계 최강이니까...

그 외의 챕터 미완의 혁명 419/베트남 전쟁/검은 이카루스 말콤X/일본의 역사왜곡/핵과 인간/20세기의 종언, 독일 통일 등도 할 말을 많게 하는 내용들이다. 미완의 혁명 4.19를 읽으며 얼마 전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에 맞춰 영결식 장에 모인 수십만 인파, 6.10 항쟁 기념집회 서울광장에 모인 10만 여 인파, 그들의 촛불... 현 정국이 이승만과 이명박을 동일시하게 만들고 있지 않나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그 때와 양상은 분명 다르겠지만 민중이 자각하는 순간 역사의 수레바퀴는 또 다시 굴러갈 것으로 생각된다.

얼마 전 읽었던 유시민의 "후불제 민주주의"에서 강조한 대한민국 헌법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주권은 국민으로 부터 나온다.는 단순명료한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참 오래 전에 들었던, 그리고 최근에는 듣지 못했던 "공작정치"는 사라지고, 소통하며 상식이 지배하는 세상이 대한민국이었으면 좋겠다.
상대적 박탈감에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민생이 아니라, 몰상식이 상식이 아니라, 힘이 정의가 아닌 그런 사회에서 숨쉬며 살고 싶다.

거꾸로 읽는 세계사... 참으로 역작이다.
이념적으로 와닿기 보다.. 보다 인간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많이 생각하게 했다.
그리고, 역사는 되풀이 된다는 것을 다시금 절실히 느낀다. 과거의 과오를 지금의 현실 정치인들이 되풀이 하지 않았으면 하는 간절한 바램이다.
Posted by 다울의 꿈


어제 아들 태우가 교회에서 부루마블을 해 보고는 집에 오자마자 자기 지갑에 있는 돈과 엄마한테 받아야할 돈을 있는데로 모았다. 금액 합계 5천 몇 백원...
부산을 떨길래 왜 그러냐고 했더니 부루마블 산단다.
얼마짜리 살 꺼냐고 했더니 8천원짜리 사러 갈거란다.
얼마얼마짜리 있냐고 했더니 5천원, 8천원, 그 위에는 2만원짜리란다.
나보고 모자란 돈을 채워 달란다. ㅎㅎ

드디어 때가 되었나?
난 내 아이들과 함께 부루마블하는 날을 손꼽아 기다려왔다.
그것도 제대로된 부루마블 게임을...

초등학교 5~6학년때 부루마블이라는 것이 대유행을 했다. 그 때 처음 나온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도 만들어내고 있는 씨앗사에서... 80년도 초반이지 아마...?
그 때 가격이 8천원.... 우리 형편에서는 비싼 장난감이라 친구들하고 판을 그리고, 돈도 만들고, 호텔 등의 건물은 전자제품에 들어가는 부속품을 이용하고....
방학 때면 하루 해가 짧게 느껴질 정도로 재미있게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 게임하는데 2~3시간은 걸리니, 2~3판 하면 저녁시간이 되곤 했다. 그 때 같이 했던 친구들이 인구,우혁,준하 ALPS....

어른이 되고, 내 아이들이 생기고 돈계산을 할 수 있을 때가 되면 내가 먼저 사와서 하고 싶었다.
그런데 아들이 먼저 사달란다... 나는 땡큐지~~~

그래서 태우를 데리고 마트에 갔다. 거기서 젤루 좋은 것으로 샀다. 2만 2천 5백원...
태우의 입이 쫘악 찢어졌다. 지가 사고 싶은 거보다 더 좋은 거니까...
태우는 내 속맘을 모르지... 내 추억을 아이들과 함께 하고 싶어서 내가 더 안달이 났었다는걸....
아내는 심통을 낸다. 뭘 비싼거 사줬냐고...?

그리고 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 꿈에도 그리던 게임을 아들, 딸과 함께 했다. 내가 은행장도 하고...
아내는 빨래하느라 같이 못하고....

부루마블... 참 롱런하는 좋은 게임이다.
세계지리, 화폐의 흐름, 경제관념 등의 교육적 효과까지 기대할 수 있다.
나도 그 때 부루마블에 등장하는 도시들을 나라와 매칭시켰던 기억이 지금까지도 또렷이 남아 있으니까....

어렸을 적 나의 로망이었던 게임을 이제서야 내 품에 넣었다.
인생 참 단순한 이유로 행복을 느꼈다.
Posted by 다울의 꿈
오후 한 3시 정도 되었나..?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절친 당선생으로 부터 뜬금없는 문자가 왔다.

'중상이 아님 합의금 얘기 꺼낼 필요없음 2~3주 정도면 도의적으로 한 번 병원에 가보면 됨~당.'

다른 사람한테 보낼걸 나한테 잘못 보냈구나 생각하고 바로 답장을 보냈다.

'엥? 먼소리여? 누가 사고났어?'

그랬더니 바로 전화가 왔다.
네이트온으로 자기한테 차사고 났다고 하지 않았냐고? 사고 나서 돈이 좀 급히 필요하게 되었다고....
그래서 계좌번호 가르쳐 달랬더니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고..,

어이없고 황당한 느낌 그 자체... 신종 메신저 사기수법에 내 아이디로 인해 내 친한 친구가 당할 뻔 했구나...
그 잠간 이라는 사이에 서로 주고 받은 문자가 상황을 제 궤도로 정리시켜 주었구나...하며 안도의 한숨...

그닥 그 일 자체에 대해 피싱사기처럼 그냥 웃고 넘어갈 뻔 했다. 그 때까지는.... 그런 일이 나한테도 일어났구나 하며...

그런데 2시간 정도 지나서, 알바생이 나한테 메신저 다른데서 로긴했냐고 묻는다.
아니라고 했더니, 내 노트북 화면에 다른 자리에서 메신저에 로그인하여 로그아웃한다는 대화창이 떠 있다는 거다. 가서 확인해 보니... 그건 현실... 황당하고 이젠 정말 당황스러워 바로 재로그인을 했다.

로그인을 하니 상황은 점입가경.... 누군가 내 계정으로 본격적인 사기를 칠 생각이었나보다.
아까 당선생에게 일이 있고나서 바로 대화명을 "누군가 내 계정으로 사기치고 있으니 돈 관련 얘기에는 응답하지 마세요."로 바꾸어 놓았는데, 그 대화명이 지워지고 이름만 남아있는 것이다.
화도 나도 이건 사건이다 생각하여, 네이트닷컴으로 가서 잽싸게 비번을 바꿨다.
그리고 내 메신저에 등록된 사람 중에 내 계정으로 접근된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고, 대화명에 그런 경우가 있을 때 내 전화로 알려달라고 했다.
단순히 장난스런 상황이 아닌 듯하여 네이트닷컴 고객센터와 사이버경찰청에 신고하려고 했~는~데, 네이트닷컴은 유선전화번호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고, 사이버경찰청은 가까운 경찰서를 선택하도록 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왔다갔다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을 듯하여 신고까지는 못했다.

이 사안의 발단이 무엇일까?
네이트닷컴의 회원정보가 유출된 것일까?
아님 내 노트북이 해킹당한 것일까?
불안하고 찜찜하다.
모든 은행거래를 인터넷뱅킹으로 하는 나로써는 몹시 불안하다. 
IT강국 대한민국이 컴터 없으면 안돌아가는 나라가 되었고, 이제 사기의 영역이 가상공간까지 확대된다고 하니, 어찌할까?
없으면 불편하고, 있으면 감당해야할 폐해도 너무 많으니... 걱정이다.
Posted by 다울의 꿈
토요일 아침, 은행에 잠시 다녀와서 현관문을 여는데 아들 녀석이 황급히 뛰어 나와 노무현 대통령이 돌아가셨단다.
뭔말인지 몰라 대충 듣고 방에 들어갔더니, 텔레비전에서 서거 소식이 나오고 있었다. 서거일 오전 10시 경....
잠시 멍했다.
현실감이 안느껴졌다.
그럴 리가 없는 분인데.... 내가 유일하게 존경하는 정치인이자 대통령인데... 비뚤어져 가는 이 나라 현대사의 줄기를 바로 잡고자, 그리고 진짜 상식이 통하고, 이 나라 국민이면 누구나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자 헌신한 분인데, 그렇게 허무하게 삶을 마감하실 리가 없다는 생각에 현실감이 전혀 없었다.
그 순간 비통함도, 착잡함도, 슬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방송 채널에서 앵커들과 기자들이 당신의 서거가 사실이라고 거듭 주장하고, 더불어 당신의 서거는 실족사가 아닌 유서가 발견된 자살이라고 얘기하는 것을 들으며 사실로 인정하기로 했다. 정말... 그냥... 인식적인 인정이다. 내 감정을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무엇때문에...?
당신의 승부사 기질이 발휘된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의 음모인가? 그런 생각도 해 본다. 요즘 주로 읽은 것이 소설들인지라, 복선처럼 깔린 음모도 생각해 봤다. 지금에 와서는 현 정치권력이 걸림돌로 여긴 당신의 명예를 짓밟으며 죽인 것으로 보면 음모론도 말이 되지 않을까...?

혼돈스럽고 혼랍스럽다.

그리고 더욱 큰 애통은 이제 더 이상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것이다.
당신의 구수한 어투 속에 묻어 있는 논리와 진실은 내 삶의 작은 기쁨이었는데, 이젠 들을 수 없다는 것이 정말 속상하다.
작금이 이 답답한 MB정권의 정책과 공권력 행사에 대한 당신의 일침을 듣고 싶었는데, 이젠 들을 수 없다는 것이 절망스럽다.

오늘 프레시안의 기사에서 당신의 죽음이 명예를 택한 것이라는 글을 읽었다.
현 정권과 집권수구세력이 당신을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예우를 하지 않음에 당신 스스로 명예를 선택한 것인가 라는 생각을 해 본다.

당신을 무너뜨리는... 당신을 마치 전두환, 노태우와 비교하며 떠드는 언론에, 한나라당 앞에 가장 명예스러운 대통령이었음에도 그렇지 못한 인식으로 대중을 현혹시키는 그들 앞에 당신은 소리없이 당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최후의, 절대 사용하지 않았으면 한 선택과 결정을 한 것인가?
"전직 대통령 중 3번째 검찰 출두...."
하지만 동네 똥개도 그 출두의 의미는 다 안다.
역사와 국민 앞에 지은 죄로 대검찰청에 들어가는 두 명의 전직 대통령과, 당신의 행보가 어찌 비교될 수 있는 것인가?
삼척동자도 다 아는 그 사실을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찌라시 신문과 언론, 한나라당은 같은 무게로 치부하며 열심히 호도해 댄다.
이건 쇄뇌다. 지난 10년간 많이 현명해진 국민을 다시금 우민화시키는 쇄뇌!!!!
이 현실 앞에 당신과 당신을 존경하는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었는가?
그 모든 무게감의 중심에 있는 당신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 누구도 당신의 짐을 같이 짊어질 수 없기에 당신은 책도 읽을 수 없고, 글도 쓸 수 없는 처지에 놓였던 것이 아닌가?
나 같은 평범한 인간의 고민은 내가 한 실수로 인한 책임을 지는 것이 전부라.... 역사적 짐을 짊어지는 것이 어떠한 무게감인지 피부로 와닿지는 않지만, 조금은 느낄 수 있다. 누구와도 나눠지지 못하는, 나만이 책임져야 하는 문제에 대한 고독감...

다시금 우울해진다. 어디에도 이런 정치인, 대통령은 없었기에...
앞으로 얼마의 시간이 흘러야 시대와 권력에 영합하지 않는... 그리고 대본대로만 읽어야 하는 문장력없는 대통령이 아닌, 국민과 자신의 행동하는 철학을 가지고 소통할 수 있는 정치인이 나올 수 있을까?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지금 현재의 현실적 기반과 힘이 없는 것이 아쉽지만, 노통과 가장 잘 통했고, 열우당에 내가 관심을 가지고 지지하게 만들었던 또 한 명의 정치인인지라 기대를 해 본다.
노통의 가치와 철학을 이어 받아, 신문을 보고 뉴스를 보며, 나도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써 자존감과 소속감이 들 수 있도록 하는 그 때를 유시민 장관이 해 줬으면 하는 바램도 가져본다. 그래서 오늘 예스24에서 노무현, 유시민으로 검색되는 책 중에 관심가는 책 6권을 주문했다.

마지막으로 재수시절 나를 울렸던 "죽은 시인의 사회" 마지막 장면을 회상해 본다.
존 키팅...Carpe Diem... 그 속의 앤더슨, 닐...
수구 보수 아버지 밑에서 키팅을 만나 비로소 자기의 선택을 하게 된 닐... 만들어진 틀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닌, 내 시선으로, 내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되면서 자기의 선택을 하게 되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아버지와 갈등하며, 힘 없는 자식된 입장에서 결국 아버지의 권총으로 자살하는 닐...
그리고 앤더슨... 수줍은 소년으로 부끄럼을 많이 타고, 나서지 못하고, 자신을 생각을 주장하지 못하는 내성적인 학생이 키팅을 만나 부끄럼을 극복하고 자기 속에 있는 자아의 자신감을 찾아내고, 삶의 주체적 재미를 만들어 간다.
기존의 전통과 틀로 IVY리그 진학율을 높이는 것이 목표인 미국 명문 고등학교 안에서 이런 키팅의 교육철학은 외면과 왕따를 당했지만, 그를 따르는 학생들을 그를 캡틴, 선장이라 부르며 존경하고 좋아한다.
하지만 학교권력 앞에 키팅을 해고를 당하고 떠나간다. 노통 당신의 미소처럼 키팅은 자신의 짐을 들고 나오며 학생들에게 눈인사를 한다.
그 때 가장 수줍은 소년 앤더슨이 책상 위로 올라간다. 그리고 소리친다. " Oh! Captain, My Captain."
교장의 눈치를 보던 학생들이 하나 둘씩 동참한다. 공부벌레 카메룬만 빼고...
마지막 장면에 키팅은 학생들을 보며 키팅's Smile을 보여주며 영화가 끝난다.

노통은 키팅과 같은 존재다.
잠들어 있는 우리의 의식을 깨웠고, 하나의 자연인으로써, 종속된 개체가 아니라 독립된 주체로써 대한민국 헌법이 보장하는 권리와 의무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을 줬다. 무엇보다 소통의 의미를 일깨워 줬다.
대학시절 어느 교양과목의 교수님은 한 학기 내내 민주주의는 "소통하는 사회"라고 강조하셨다.

노무현 前 대통령님... 당신의 나의 영원한 대통령이십니다.
편히 잠 드세요.
당신이 지난 시간 일궈놓은 역사의 물줄기는 힘없이 사그라들지 않을 것입니다.
민초가 깨어나고, 생각할 수 있는 힘이 생기고, 무엇이 진실인지 판단할 수 있는 분별력이 생기고 있기에, 당신이 추구했던 가치는 더 이상 수면 아래로 다시금 가라앉지 않을 것이고, 우리의 일상이 되어 더 이상 민주주의를 노래하지 않아도 되는 당연한 그 때가 올 것입니다.
편히 잠드십시오.
사랑합니다.

Posted by 다울의 꿈

오늘 어버이날이다.
어제 부모님을 찾아뵙고, 오늘은 우리 태우와 예원이에게 어버이 대접(?)을 받았다.

예원이가 어제 학교에서 열심히 만들어 온 카드며 편지로 구성된 어버이 은혜 패키지 안에 아빠와 엄마에게 수여하는 상장이 들어 있다.

엄마는 청소상... 우리 집에서 청소를 제일 잘 한다고 준단다. 맞는 말이긴 한데, 그거보다 더 고상하고 좋은 상 제목이 있을텐데... 그걸로 각인되었다니 아쉽다.

내가 받은 아빠상은 고치기상이다. 우리 집에서 무엇이든 잘 고치기에 상을 준단다.

집에서 컴퓨터 고칠 사람이 나 밖에 없으니 문제 생기면 열일 제쳐두고 고쳐서 아이들이 컴터 사용하는데 문제없게 해 주어야 하고, 못질, 망치질 등등 하드한 일도 할 사람이 나밖에 없으니, 예원이가 준 상은 타당한다. 근데, 약간의 씁쓸함이 존재하는 것은 왜일까?

좀 더 고상한 상이 주어졌으면 어떨까?

난 우리 아이들에게 책도 잘 읽어주고(책 읽어주는 아빠상), 잠 잘때 이야기 들려주는 것도 잘하고(이야기 잘 들려주는 아빠상), 매일매일 잠자기 전 머리맡에서 기도도 해 주고(기도상) 하니까 생각하면 참 많은데 그 중에 컴퓨터를 비롯한 여러가지를 잘 고쳐주는게 가장 각인이 된 것일까?

위 사진을 보면 오늘의 나와 다른 예전의 나를 만나게 된다.
2008년 어느 날인가 기획팀원들과 코엑스에 이러닝 박람회를 갔다가 코엑스 주차장 앞에서 찍은 사진이다.
현재의 나는 서점과 복사실을 운영하는 사람이다. 사장이다. 실장으로 불리는....

그 때의 나는 한 회사의 본부장이다. PM팀, 설계팀, 개발팀의 3팀 23명의 본부원을 거느린...

지금의 나는 양복을 입을 수 없다. 편한 캐주얼로 복사, 제본, 문구, 도서판매 등의 먼지나는 일을 한다. 그래서 맨날 청바지에 면티를 입는다.

그 때의 나는 양복만 입어야 한다. 와이셔츠에 넥타이, 그리고 최대한 젠틀에 보이는 양복에 구두...
잦은 회의와 미팅 등으로 회사의 품위를 보여줘야 하기에...
그리고 그 때는 컴퓨터 앞에서 보고를 받거나, 자료를 만들고, 회의실에서 미팅하고, 외부에 나가서 프리젠테이션 하고 등등의 화이트컬러로써 살아왔다.

태우와 예원이랑 얘기를 하다보면, 지금의 서점, 복사실 실장님보다 그 때의 본부장을 더 멋있어 한다.
지금 아빠가 더 행복하고 돈도 더 많이 벌어... 라고 아이들을 위안해도 아이들 스스로의 느낌과 생각을 바꾸지는 않는다.
몇 번 그 때의 회사에 와보고, 내 자리에 앉아보고, 내 직원들의 인사를 받아보면서 아빠의 모습에 뿌듯함과 자랑스러움이 있었나보다. 외형상으로 지금의 서점, 복사실은 그 때의 인상만큼 강렬하진 않은가 보다.



나는 나의 변화에 성공하고 있는 중이다.
태우와 예원이가 기대하는 아빠의 명예를 찾다보면 그 때의 내모습에서 보았던 명예스러운 아빠를 이 곳에서도 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런데 무엇보다, 내가 하는 내일을 내 스스로 명예롭게 생각하고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내 속의 내적 에너지를 충만하게 함으로....
Posted by 다울의 꿈
2008년 가을...
지금의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면서, 아들과의 목표를 하나 정했다.
태우가 4학년 되는 때부터 아빠랑 공유할 수 있는 여행경험 쌓기...

첫 번째이기에 쉽게 시도할 수 없는, 많은 준비가 필요한 것으로 정하기로 했다.
그 당시 태우는 초등 2학년이었고, 2년이란 시간이 남아있어서 스케일을 키워보고 싶었다.

그때 내 심장은 나에게 터키에 가보라고 권했다.
그리고 나는 서슴없이 터키를 나와 태우의 Hard Travel Course로 낙점하고, 거꾸로 터키에 가야 하는 이유를 찾기 시작했다.

나름 괜찮은 방법이라 생각한다.
이런저런 이유로 저기를 하고 싶다가 가장 많이 선호되는 것이지만, 저길 가고 싶어서 이런 저런 정보를 찾다보니 정말 더 가고 싶게 되었다고 괜찮은 결론 도출방법이라 생각한다.
자료와 정보를 찾는 중에 내 맘에 내키는 정보가 낚이지 않으면 다른 행선지를 알아보면 되니까...

여하튼 터키는 왜 그런지 모르게 내 마음이 끌렸다.
그래서 지금 터키를 공부하며 가야 하는 이유와 목적을 정의하고 있다. Mission Statement!!!!

우선 터키에 대한 정보를 찾으면서 드는 첫 번째 이끌림은 "미안함"이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터키의 한국에 대한 One Side Love의 미안함이다.
주워들은 정보에 의하면 터키인들은 우리나라를 "형제의 나라"라고 생각하고, 다른 여타국민에 비해 무지 친절하게 대한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터키에 대한 애정이 그리 없다. 역사에서 너무 멀어있고 무관하기에 친밀감 "0"의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래 저래 자료를 보다 보니 그네들과의 역사는 1천 년을 훌쩍 뛰어넘어 고구려 시대, 연개소문 시대 즈음 열애를 하고 있었다 하고, 터키인들은 그 당시 우리 고구려와의 관계를 역사시간에 배우며 우리나라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을 유지하고 있다하니... 부끄럽다. 나 또한 터키가 돌궐이었으며, 우리와 함께 수나라에 대항하여 싸운 동맹국이었으며, 연개소문이 돌궐의 공주와 결혼하여 피를 나누었다고 하는 역사적 사실을 근자에 들어서야 알게되었으니 부끄러울 따름이다. 그 미안함을 씻고파서 터키를 가야 한다. 가서 나도 아니, 우리나라도 너희들을 형제라고 생각한다며 그들과 진지한 대화와 허깅을 하고 돌아오고 싶다.

터키를 가야하는 두 번째 이유는 "파묵칼레"이다.
한 20년 전 우리 목사님께서 첫 번째 성지순례를 다녀오시고, 찍어온 사진 속의 장면을 잊지 못하고 있다.
그 때는 석회암으로 둘러싸인 노천온천인데, 참 특이하고 저기로 휴가, 여행을 다녀오면 참 좋겠다는 좋은 인상 정도였는데, 터키 정보를 찾다보니 거기가 터키 내륙에 있는 파묵칼레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또 어느 터키여행 책에 소개된 그 지역 사람들과 호텔 이야기를 읽으며 정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파무칼레를 가게되면 난 거기서 태우와 반나절 정도를 온천하며, 책 한 권정도 읽으며 시간을 소요하고 싶다.

그 다음 터키가 끌리는 이유는 "지중해"이다.
왠지 낭만적이고, 왠지 모를 아름다움이 존재할 것 같은 지중해를 보고 싶다. 수많은 역사적 발자취가 살아있는 실크로드와 이스탄불, 그리고 아름다운 지중해... 거길 가고 싶다.

마지막으로 떠 오르는 생각은 "바울의 발자취와 초기 기독교의 성지"를 보고 싶다.
이게 첫 항목일지 마지막 항목일지 잠시 고민되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마지막 항목으로 두고 싶다.
차후 진짜 성지순례를 가게될 때는 첫 항목이 되겠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성지순례는 옵션이기 때문이다.
에베소나 많은 기독교 유적은 나와 태우의 발품을 파는 범위 내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터키 여행의 목적을 다시 정리하자면...
1. 형제의 나라 터키에 대해 좀 더 친밀해 지기(그들의 정치,경제,역사 등) : 형제에 대해 많이 알기
2. 터키만이 가지고 있는 자연환경 및 문화유적 즐기기(지중해, 파묵칼레, 블루모스크, 그랜드 바자르, 카펫 등)
3. 초대교회 및 바울의 흔적 만나기


이렇게 거창하게 선언하고 보니, 한 달 정도를 여행을 하고 와야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고 있는 일정은 9일 ~ 10일 정도...
여행사를 통하지 않고, 발품 팔아 돌아다닐 생각이니 아주 치밀하지 않으면 많은 시간이 허비될 것이고, 현지에서 발생할 돌발상황들을 생각하면 변수가 많으리라 생각한다.
많은 비용을 들여 여행을 갔기에 최대한 본전을 뽑기 위해 많은 좋은 것을 경험해 봐야하겠지만, 위의 3가지 목적은 여행을 좀 더 가치있게 하기 위한 Objects일 뿐이고, 최상위의 Goal은 태우와 아빠의 공통경험 만들기와 소통에 있다. 의식이 커 가는 아들과 지속가능한 소통을 만들어 내는 것이 터키 여행에 기대하는 아빠의 작지만, 소박하지만, 쉽게 손에 넣을 수 없는 원대한 꿈이자 목표이다.
Posted by 다울의 꿈

현재의 몽고 초원에 거주했던 유목민은 옛부터 늘 중국의 안보를 심각하게 위협했다. 이들에 관한 기록은 대체로 중국측이 남겨 놓았고 유목민 스스로 남긴 기록은 매우 적다.


  B. C. 221년 중국이 춘추전국시대의 분열을 끝내고 진秦에 의해 통일되었을 무렵, 흉노족이 유목국가를 건설했다. 시황제가 장군 몽염을 보내어 격퇴시켰으나 곧 세력을 회복하였고, 진을 이은 한나라는 무력의 열세를 어찌할 수 없어 조공으로 평화를 유지했다. 한 무제(武帝, 재위 B. C. 140~87)의 10년에 걸친 대규모 원정으로도 이들을 뿌리뽑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내분으로 2차에 걸쳐 흉노가 분열하여 중국은 한동안 우월한 입장을 누렸다. A. D. 3세기에 들어와 크게 다섯 계통의 유목민 집단이 중국으로 이주, 이른바 5호 16국 시대가 열렸다. 이중 선비족이 세운 북위北魏가 강북을 통일하였고(439) 강남 지역은 한족漢族이 세운 여러 왕조가 명맥을 이었다. 이러한 남북 분열 상황으로 후세에 이때를 남북조 시대라 부른다.


  중국의 남복조 시대에는 몽고 계통의 유목국가인 유연(柔然, 또는 茹茹로도 표기)이 북조를 위협하였다. 6세기 중반 유연에 신속臣屬한 유목부족의 하나였던 투르크 계통의 돌궐突厥이 흥기, 유연을 격파하고(552) 초원의 패자가 되었다.


  한자 표기인 돌궐의 정식 명칭은 돌궐 비문에 따르면 '쾩-튀르크(Kok Turk)' 로 하늘(Kok) 에 속한 신성한 투르크란 의미를 가진다. 이로부터 투르크가 정식 종족명으로, 또한 국명으로 사용되었으며 오늘날까지 지구상의 다양한 투르크 계 종족이 연대 의식을 가지고 있다.


  돌궐 제국의 창건자는 부민(Bumin, 土門)으로 그가 돌궐 부족 연맹의 지도자로 부상하고 집권하기까지의 과정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가 중국 사서에 등장하는 시기는 535년이다. 545년 중국의 서위西魏와 동맹 관계를 맺은 그는 유연에 대해 유연의 공주와의 혼인을 요구했다. 이는 유연에 대한 노골적인 도전의사였다.

 

유연이 거절하자 부민은 서위의 공주를 맞아들이고 552년초 서위와 연합하여 유연을 멸망시켰다. 이때 부민은 일 카간(Il- Qagan, 伊利可汗) 이란 호칭을 쓰면서 초원의 지배자임을 공언하였다. 그러나 그 해에 사망하였다.


  일 카간의 사후 관습대로 형제와 자식들에게 제국이 분배되었다. 돌궐 제국의 서부 지역은 일 카간과 함께 정복전에 참가해 공이 큰 동생 이스테미(Istemi, 室點密)가 계속 통치하였다. 동부 지역의 통치권은 일 카간의 아들 콜로(Kolo, 科羅)가 승계했다가 일찍 죽어 아우인 무한(Mukhan, 木杆,)이 553년 새로운 카간으로 즉위했다.


  돌궐 서부 지역의 이스테미는 카간 대신 야브구(Yabgu, 葉護 ; 제 2왕) 칭호를 사용하여 동부 지역에 대한 하위 개념을 분명히 했다. 이스테미 야브구는 서쪽으로 영토를 계속 확장했으며 동로마와 페르시아의 사산 왕조와 교류하였다. 에프탈리테 부족이 실크 로드의 중개 무역을 장악하자 이스테미 야브구는 사산 왕조와 합동하여 에프탈리테를 멸하였다(557). 이 지역은 아무 강(지금의 Oxus 강)을 경계로 분할되었다.<#TAG>   돌궐 비문의 하나인 퀼 테긴 카간의 비문에는 돌궐의 초창기 정복 활동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위로 푸른 하늘과 아래로 적갈색 땅이 창조되었을 때, 그 둘 사이에 사람이 창조되었다. 사람들 위에는 나의 조상 부민 카간과 이스테미 카간이 보위에 앉았다. 보위에 앉아서 돌궐족의 국법을 잡아 주었고, 세워주었다.

 

사방은 모두 적이었다. 오만한 자들을 머리 숙이게 하고 힘있는 자들을 무릅을 꿇게 하였다. 동쪽으로는 카디르칸(흥안령 산맥) 까지 서쪽으로는 철 문(鐵門 ; 트란스옥사니아) 까지 (부족민들을) 자리잡게 하였다. 두 (경계) 사이에서 아무런 조직도 없이 (살았던) 쾩 투르크(Kok Turk) 인들을 수습하여 그렇게 다스렸다.


  [그분들은] 현명한 군주들이었다. 용감한 군주들이었다. 지휘관들도 정녕 현명하였다. 정녕 용감하였다. 지배층도 부족민들과 분명 평화와 조화 속에 있었다. 그리하였기 때문에 나라를 그렇게 잘 다스리었다. 나라를 다스리고 법을 세웠다.

  동부 지역의 무한 카간은 555년 유연의 잔존 세력을 소탕하고 그 부근의 여러 유목 부족을 병합하였다. 더 나아가 동쪽의 거란을 복속시키고 고구려를 침공하였다.『삼국사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가을 9월, 돌궐이 신성新城을 포위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자, 군대를 이동하여 백암성을 공격하였다. 왕이 장군 고흘高紇에게 군사 1만을 주어 그들을 물리치고, 1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신라가 침공하여 열 개의 성을 빼앗았다.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陽原王 7年)

  『삼국사기』에 나오는 삼국의 대외관계는 대부분 중국 사서를 인용한 것이다. 그러므로 삼국과 중국의 관계는 모두 조공관계로 묘사되었다. 이에 비해 돌궐과의 충돌을 전하는 이 기록은 중국 사서에 나오지 않는 고유 기록이다. 이 해는 551년에 해당하며 고구려가 신라·백제 연합군에 의해 한강 유역을 상실한 해이다.

 

그러나 돌궐의 성장과정을 추적해 보면 551년에 고구려를 공격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삼국사기』의 기록은 551년 이후에 있었던 사실을 전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TAG>   고구려와 돌궐의 전쟁은 중국의 기록에 단편적으로 나온다. 그에 따르면 고구려는 말갈 부족과 더불어 돌궐을 격파했다.

 

돌궐의 고구려 침공은 처음에는 돌궐이 유연의 잔여 세력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듯 하다. 6세기 말~7세기 초 활동하였던 동로마 역사가 시모카테스Simokattes는 유연의 잔여 세력이 중국(북제)으로 도주했고 그곳에서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가 쫓기어 동쪽의 Moukri(고구려)로 갔다고 기록했다.

 

그는 Moukri는 "중국에 인접해 있다. Moukri인들은 위험에 대처하는 강인한 정신력과 매일매일의 신체단련으로 그들의 투지는 매우 높았다" 고 하였다. 동로마 제국은 돌궐과 비단을 매개로 교류하였던 관계로 돌궐을 통해 고구려에 대한 지식이 전해졌고, 이로 인해 동로마 문헌에 이러한 기록이 남았다 (568년 돌궐의 사신이 비잔티움에 도착한 것이 최초의 접촉이었다).


  '고구려인들은 … 매일매일의 신체단련으로 그들의 투지는 매우 높았다' 라는 동로마의 기록은 중국의 역사서인『구당서舊唐書』에 나오는 기록과 일치한다.

  각 거리마다 큰 집을 지어 경당 堂이라 부른다. 자제子弟들이 결혼할 때까지 밤낮으로 이곳에서 독서와 활쏘기를 익히게 한다. (『구당서舊唐書』「동이 열전」고구려)

  고구려로 이주한 유연으로 말미암아 돌궐과 고구려 사이에 전단(戰端)이 일어났을 가능성은 충분히 상정해 볼 수 있다. 또한 고구려와 돌궐은 두 나라 사이에 있는 거란족과 말갈족을 복속시키려는 과정에서 충돌하여 오랬동안 적대국으로 지냈다. 중국 역사서에서 단편적으로 이러한 모습이 보인다.

  … 왕년에 이계찰(利稽察)이 고구려·말갈에 크게 격파되고 … (隋書, 突厥傳)

  이 기록은 돌궐이 고보녕(高保寧 ; 북제 말기에 영주자사가 되었고, 북제가 멸망하자 북주와 그 뒤를 이은 수에 투항하기를 거부하고 독립세력으로 있었음)과 연합하여 581~582년에 수를 침입, 수군을 격파하자 이에 격분한 수 문제 양견이 582년에 내린 조서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계찰(利稽察)에서의 '察'은 돌궐의 관직명 '샤드(Shad)'를 뜻하며 設, 殺, 煞로도 표기된다. 돌궐 제일 제국에는 28관등이 있었는데 Shad는 야브구(Yabgu, 葉護 ; 제 2왕)다음의 제 2관등이다. 이 자리는 돌궐 왕족에게만 주어지는 것으로 그 직능은 '別部領兵者' 로 부족을 거느리면서 부족민을 지배하였다.

 

 고구려가 돌궐의 이계찰을 격파한 것은 돌궐의 동진을 성공적으로 막았음을 보여주는 일이다. <#TAG>   북위는 534년 동서로 분열되고 동위東魏와 서위西魏는 각각 북제(北齊, 550년 건국)와 북주(北周, 557년 건국)로 이어졌다. 이러한 중국 북조의 내분기에 건국한 돌궐은 유연과 달리 북조에 우월한 지위를 누렸다(북위에 눌렸던 유연도 북위가 동서로 분열하자 잠시동안이나마 우위를 누렸다).


  돌궐은 건국 무렵부터 서위와 동맹관계였고 서위를 계승한 북주와도 동맹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돌궐은 늘 창구를 열어 놓았고 돌궐을 중립화 내지 자기편으로 만드려는 북제의 헌상을 받았다. 이에 따라 북주도 부지런히 헌상을 하였고 북주의 태조는 무한 카간의 딸을 황후로 맞이하는 굴욕을 자청하였다(565).

 

당시의 외교 관례상 외국 공주를 후궁이 아닌 황후(皇后)로 영입하는 것은 하위 신분임을 공식 천명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연이 강성할 때 처음에는 서위가, 나중에는 동위가 유연의 공주를 각각 황후로 맞아들인 것은 유연의 세력을 이용하여 상대를 제압하려는 궁여지책이었다. 북주와 북제는 서로 돌궐 공주를 맞아들이려 다투다가 북주가 승리를 거두었다. 분열로 열세에 놓인 중원 국가들이 스스로 굴욕을 자청한 셈이다.

  돌궐 제국의 위세를 떨친 무한 카간은 572년 사망했다. 그의 공적과 당시 국제사회에서의 위상은 돌궐 비문에 잘 나타나 있다.

  사방에 군대를 보내어 모든 종족을 복속시키고, 머리를 가진 자는 머리를 숙이게 하고, 무릅을 가진 자는 무릅을 꿇게 하셨도다. 앞(동)으로는 킨칸 산맥에, 뒤(서)로는 철문(鐵門) 에 이르기까지 돌궐 민족이 지배하는 돌궐 국가가 되었다. 그는 현명한 군주였다. 용감한 군주였다. 신하들과 귀족, 백성들도 모두 현명하고 용감하였다. ― 외투켄에서 거행된 그의 장례식에는 사방의 국가와 종족이 모두 슬퍼하며 조문 사절을 보냈다. 중국, 티벳, 비잔틴, 아바르(유연), 거란 그리고 고구려 등등 ―

  무한 카간을 이어 그의 동생인 타파르(Tapar, 陀鉢, 재위 572~581)가 카간이 되었다. 그의 즉위후에도 한동안 돌궐의 중국의 북조에 대한 우위는 유지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주서周書』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당시 제나라와 교전할 때라 해마다 군대를 동원하였기 때문에 매번 돌궐과 연결하여 외원으로 삼았다. …… 이래 그 나라는 부강하여 중국을 능멸하려는 뜻이 있었다. 조정은 화친을 맺고도 해마다 십만필을 주었으며 수도에 있는 돌궐인을 모두 후히 대접하니 비단옷을 입고 고기를 먹으며 (호화스럽게) 사는 자가 수천명이었다.

 

 제나라는 그들의 침략이 두려워 역시 나라 살림을 기울여 증물贈物을 보냈다. 타파르(陀鉢)는 더욱 교만해져 그 부하들을 거느리며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즉 "우리에게 남쪽의 효순孝順한 두 아이 놈(북주와 북제)만 있다면 무었 때문에 재물이 없을 것을 걱정하겠는가?"<#TAG>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577년 북주가 북제를 합병하여 북중국이 통일되었다. 돌궐은 즉각 북제 부흥을 내걸고 북주를 공격하였다.

 

아직도 돌궐의 군사적 우위는 여전했으나 곧 이어 유목 국가에서 일어나기 쉬운 국가 분열이 일어났다. 일 카간의 동생으로 돌궐 서부를 다스리던 이스테미 야브구는 576년 사망하였다. 그의 뒤를 이은 아들 타르두(Tardu, 達頭, 재위 576~603)는 동부 돌궐의 종주권을 인정한 아버지와 달리 완전 독립을 추구했다. 우선 야브구 위에 오른 직후 타파르 카간의 통제를 단호히 거부하고 스스로 카간으로 행동했다.


  581년은 중국과 돌궐에 큰 전환점이 된다. 이 해에 동돌궐에서는 타파르 카간이 사망하고 계승분쟁이 일어났으며, 북주에서는 외척 양견이 제위를 찬탈하여 수를 건국하였다. 카간 자리를 놓고 타파르 카간의 아들 안로(Anro, 菴羅)와 조카인 탈로핀(Talopien, 大邏便)이 경쟁하였다.

 

 탈로핀은 처음에 타파르 카간에 의해 카간으로 추천되었으나 돌궐의 귀족 회의 (Toy)는 그의 모친이 돌궐계가 아니라는 이유로 카간 자격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안로가 즉위했으나 이번에는 탈로핀 측이 강력히 반발, 결국 타협하여 콜로 카간의 아들인 이쉬바라(Ishbara, 始波羅, 재위 581~587)에게 양위하였다.


  이쉬바라는 안로에게 제 2 카간 칭호를, 다로빈에게는 아파 카간(Apa Qagan) 이란 칭호를 주어 단결을 도모했다. 그러나 다로빈은 서부 돌궐의 타르두에게 가서 자신의 입지를 확보하려 했다. 이쉬바라의 하툰(可敦 ; 황후)은 북주의 천금(千金) 공주였는데 가문의 복수를 주장하는 그녀의 영향력으로 돌궐은 수와 교전하게 되었다.


  돌궐과의 전쟁은 수의 창업주 수 문제 양견(재위 581~604)에게 큰 위협이었으므로 돌궐 의 분열시키려 즉시 돌궐 서부의 타르두에게 접근하여 돌궐 카간으로 인정하였다. 이쉬바라카간은 중국과 돌궐 서부를 적으로 상대하는 부담을 안게 되었다. 이쉬바라는 우선 자신의 통치 영역에 있는 다로빈의 근거지를 초토화시키고 추종 세력을 소탕하였다.

 

 결국 582년 타르두가 동부 돌궐의 카간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선언하여 돌궐은 공식적으로 동서로 양분되었다. 돌궐은 분열되고 북중국은 통일되니 돌궐, 특히 동돌궐의 열세는 분명해졌다.


[출처]http://kin.naver.com/knowhow/entry.php?d1id=10&dir_id=10&eid=3IOJAl7G83fSknYfYtfG1G11RAseBkRo&qb=sO2xuLfBv80gtbmxyA==&enc=euc-kr&pid=fQj%2Fhloi5TGssZQd72Zsss--452232&sid=Sfa-YsGb9kkAAECaoxA
Posted by 다울의 꿈
'터키'하면 형제의 나라라는 수식어가 떠오르지만
실제로, 그렇게 불리어지는 이유를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6.25 때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병력을 파견했다고.

그렇다면 '왜?' 그렇게 많은 병력을 파견했는가.. 라는 질문을 하면 그들은 대답하지 못한다.
그건 궁극적인 이유가 될 수 없다.

터키인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투르크'라고 부른다.
우리가 코리아를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것처럼.

역사를 배웠다면 고구려와 동시대에 존재했던 '돌궐'이라는 나라를 알고 있을 것이다.
투르크는 돌궐의 다른 발음이며 같은 우랄 알타이 계통이었던 고구려와 돌궐은 동맹을 맺어 가깝게 지냈는데 돌궐이 위구르에 멸망한 후, 남아있던 이들이 서방으로 이동하여 결국 후에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건설하게 된다.

원래, 나라와 나라사이엔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는 법이지만 돌궐과 고구려는 계속 우호적이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서로를 '형제의 나라'라 불렀고 세월이 흘러 지금의 터키에 자리잡은 그들은 고구려의 후예인 한국인들을 여전히 형제의 나라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즉,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형제의 관계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의문점 하나.
우리는 왜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까?
그리고 터키인들은 왜 아직도 우리를 형제의 나라라고 부를까?

답은 간단하다.
역사 교과서의 차이다.

우리나라의 중,고 역사 교과서는 '돌궐'이란 나라에 대해 단지 몇 줄만 할애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돌궐이 이동해 터키가 됐다느니 훈족이 이동해 헝가리가 됐다느니 하는 얘기는 전무하다.

터키는 다르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경험했던 터키는 그들의 역사를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학교에서 역사 과목의 비중이 아주 높은 편이며 돌궐 시절의 고구려라는 우방국에 대한 설명 역시 아주 상세하다.
'형제의 나라'였다는 설명과 함께.
그래서 대부분의 터키인들은 한국을 사랑한다.
설령 한국이 그들을 몰라줄지라도..

실제로 터키인들은 한국인들 역시도 그들과 같은 생각을 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한국인들도 터키를 형제의 나라라 칭하며 그들을 사랑할 것이라 믿고 있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88 서울 올림픽 때 터키의 한 고위층 관계자가 한국을 방문했다.
자신을 터키인이라 소개하면 한국인들에게서 큰 환영을 받을 것이라 생각했으나 그렇지 않은 데 대해 놀란 그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물었다.

'터키라는 나라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돌아온 답은 대부분 '아니오'였다.
충격을 받고 터키로 돌아간 그는 자국 신문에 이런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한다.

'이제.. 짝사랑은 그만합시다..'

이런 어색한 기류가 급반전된 계기는 바로 2002 월드컵이었다.
'한국과 터키는 형제의 나라, 터키를 응원하자'라는 내용의 글이 인터넷을 타고 여기저기 퍼져나갔고 터키 유학생들이 터키인들의 따뜻한 한국사랑을 소개하면서 터키에 대한 한국인들의 관심이 증폭되게 되었다.
6.25 참전과 올림픽 등에서 나타난 그들의 한국사랑을 알게 된 한국인들은 월드컵을 치르는 동안 터키의 홈구장과 홈팬들이 되어 열정적으로 그들을 응원했다.

하이라이트는 한국과 터키의 3,4위전.
자국에서조차 본 적이 없는 대형 터키 국기가 관중석에 펼쳐지는 순간 TV로 경기를 지켜보던 수많은 터키인들이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한다.
경기는 한국 선수들과 터키 선수들의 살가운 어깨동무로 끝이 났고 터키인들은 승리보다도 한국인들의 터키사랑에 더욱 감동했으며 그렇게.. 한국과 터키의 '형제애'는 더욱 굳건해졌다.

우리는 이유를 알아야 한다.
터키가 형제의 나라가 된 궁극적인 이유를 모르면 KBS의 어느 아나운서가 패널이었던 터키인에게 '아우님'이라 불렀던 어리석은 짓도 가능한 것이다.
형제는 '형과 동생'을 따지자는 말이 아니다.
그들에게 형제는 곧 친구며 우방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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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의 언어에는 순우리말과 비슷한 단어가 참 많습니다.

말뿐 아니라 음식, 문화, 습성, 국민정서 (터키인 우월주의에, 감정적 다혈질이면서 반대로 다정다감하고, 거나하게 놀기 좋아하고, 어쩜 그렇게 성질 급한 것까지..)도 상당히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유럽인치고는 흔하지 않게 몽고반점도 있습니다.



과거 돌궐(투르크 => 터키)과 고구려는 그냥 우방이 아니라, 이와 잇몸 같은 관계였다고까지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돌궐의 공주와 결혼을 하였을 정도니까요.

고구려 멸망 후 돌궐도 망했으며 서쪽으로 옮겨 서돌궐을 건국하게 됩니다. 서돌궐이 훗날 오스만 제국... 그리고 터키가 됩니다.

혈통이 고구려와 혼혈이라고 생각하시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역사 교과서에서 돌궐을 다루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돌궐의 위치 때문이 아니였나 생각됩니다.
사서에는 고구려와 돌궐이 국경을 맞대고 있는 것으로 기술되어 있는데, 당시 돌궐은 중앙아시아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영토가 중앙아시아, 즉 실크로드(서안) 부근까지가 영토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리고 돌궐은 만주 지역에까지 영토를 넓힌 적도 없습니다.
따라서, 고구려의 영토가 만주와 한반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중앙 아시아 까지(돌궐과 맞닿은), 매우 방대했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중국이 동북공정에 더욱 박차를 가하는 이유도 여기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보면 '터키'라는 나라는 과거 청동기시대인 배달국, 고조선, 부여 시대에는 동이족에 속해 있다가 고구려의 세력이 확장되면서 고구려가 부여를 정벌하자 그곳에 살던 원주민(예맥 동이족)들이 요하를 건너가 이루게된 민족입니다.

돌궐족은 중국의 대부분을 수나라가 통일하자 고구려와 돌궐은 연합하여 수나라를 공격하게 됩니다. 그러나 오히려 수나라의 침략을 받아 요서지방은 수나라에 점령되고 돌궐은 서쪽으로 쫓겨나게 되는데 그들이 서쪽으로 이주해 정착하여 오스만-투르크 제국을 건설하였고, 아랍과 발칸반도를 지배하며 강성했던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19세기 중반부터 쇠퇴하면서 주변의 영토를 잃고(소수민족 모두 독립) 지금에 터키만 남게 된 것입니다.

같은 우랄-알타이 계통의 언어를 사용했지만 통일신라시대 이후 우리는 중국의 영향으로 한문을 사용했고, 터키는 아랍의 영향을 받아 언어는 전혀 다르게 발전하게 됩니다.


유전학이나 인류학적으로도 터키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몇개 안되는 북방계 몽골리언국가(몽고, 한국, 일본, 에스키모, 인디언) 중 하나로, 헝가리 와 함께 북방계 몽골리언의 유전자가 많이 남아있는 유럽국가입니다.

터키인은 '코리아'의 어원이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의 영문표기라는 것까지도 알고 있습니다. 대단한 형제사랑이지요..

그렇다면, 북한도 같은 민족인데 어째서 한국과 형제인 터키가 6.25 때 남한편에만 병력을 파병했을까..

한국과 일본의 관계만큼이나 아르메니아인들과 터키는 견원지간입니다. 아니, 원수지간이라는 말이 더 적절하겠네요.

과거 아르메니아인(오스만 기독교인들)들이 터키인(투르크 이슬람교도)에게 대학살을 당했기 때문이지요.

과거 오스만터키에서 소수민족들이 독립을 하면서 쇠약해진 국력과 맞물린 굴절된 민족주의로 말미암아 아르메니아인 수천명이 죽임을 당하는 1차 대학살의 참사가 벌어집니다.
유럽으로 남진하려하는 러시아의 힘을 얻어 루마니아와 세르비아가 독립을 하게되고 오스만터키의 아르메니아 영토 대부분을 러시아가 차지하는 셈이 되자 이에 분노한 투르크인들이 러시아와 붙어먹은 아르메인들을 표적으로 인종청소라는 대학살을 감행한거죠.

1차 대학살 20년후 또 다시 오스만터키 정부의 도움을 받은 투르크 이슬람교도들은 아르메니아인 5만명에 대학살을 자행합니다. (2차대학살) 게다가 정부는 학살된 아르메니아인 외 175만명을 추가로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로 추방하고 그 추방하는 과정에 60만명이 사막에서 목숨을 잃게 됩니다.

(1894년~1915년까지 250만명이였던 아르메니아인은 30만명만이 살아남게 됩니다.)

그후 1912년 발칸전쟁 때 몬테니그로, 불가리아, 그리스가 오스만터키에서 독립할 때도 알게모르게 러시아가 개입하여 아르메니아인을 도와줍니다. 따라서 러시아가 북한을 지원하기 때문에 당연히 터키는 그 반대 쪽인 남한에만 병력을 파견한 거지요.



물론 혹자는 당시 터키가 미국과의 우방적 연계로 말미암은 국제적 이득을 노린 선택일 뿐이였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역사의 흐름이라는 큰 범주에서 바라본다면,
터키가 2차 세계대전 때 우리의 동맹국 중의 하나였던 이유가 필연적으로 러시아와 적대 관계일 수 밖에 없는 과거사 때문이였다고 보는게 타당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형제의 나라..

한국의 경제성장을 자기일처럼 기뻐하고 자부심을 갖는 나라, 2002년 월드컵 터키전이 있던 날 한국인에게는 식사비와 호텔비를 안받던 나라.. 월드컵 때 우리가 흔든 터키 국기(國旗)가 터키에 폭발적인 한국 바람을 일으켜 그후 터키 수출이 2003년 59%, 2004년 71%나 늘어났다는 KOTRA 통계가 있습니다.

이런 관계를 지닌, 자기 나라로부터 수백만리 떨어진 곳에서 보내는 의리와 애정을 받는 나라가 세상에 몇이나 되겠습니까.
Posted by 다울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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